1941년 권중달은 2월28일(음력 경진년 11월 5일) 지금의 인천시 계양구 갈현동 24번지에서 아버지 명규(明圭) 공(公)과 어머니 문순임(文順臨) 여사 사이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다. 그의 가정은 오지에서 몇 마지기 논농사와 밭뙈기를 겨우 경작하여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지내는 잔반(殘班)의 후예였다.
1944년 권중달이 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리(長利)쌀을 빌려야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는 살림살이어서 중학교에 진학을 꿈으로 여기다.
1956년 권중달이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조카들까지 10여 식구가 입에 풀칠도 어려운 환경이어서 고교 입학시험을 안 치자 20리 길을 걸어와 입학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담임선생님의 정성에도 등록금이 무서워 아무 소리를 못하다.
1959년 권중달은 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가형과 함께 대처로 나오다. 인천과 서울에서 동가식서가숙 하며 주경야독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다.
1962년

권중달은 중앙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다. 대학 시절,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다.

1966년 권중달은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동양사를 전공하다. 그해 10월에 군에 입대하여 3년간 사병으로 복무하다.
1969년

권중달은 9월부터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조교가 되다.

1971년 권중달은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하다.
1972년 권중달은 대만 중화민국국립대만대학 역사연구소로 유학을 떠나다.
1973년

권중달은 대만에서 함께 유학하던 정철재(鄭哲在)를 만나 결혼하다. 9월에 중화민국 국립정치대학 중국연구소 박사과정에 입학하다.

1976년 권중달은 2월 국립정치대학을 수료하고 귀국, 모교인 중앙대 사학과 전임강사가 되다. 이후 오직 연구실만 지키며 학문에 정진하다.
1979년

권중달은 박사학위 논문 <자치통감이 한국과 중국에 끼친 학술적 영향>으로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다.

1982년 권중달은 5월에 총무처가 주관하는 제5회 군법무관임용시험 시험위원과 9월에는 제26회 행정고등고시 시험위원을 지내다.
1983년 권중달은 3월부터 12월까지 국립강원대 역사교육과 강사를 지내다.
1987년 권중달은 중앙대 중앙문화연구원 사무국장에 선임되어 1989년 8월까지 맡다. 3월부터 1989년 2월까지 한국외국어대학 강사를 지내다.
1988년

권중달은 경희대대학원과 숭전대대학원에서 강사를 지내다. 총무처 주관 제30회 사법시험과 제8회 군법무관시험 시험위원을 지내다.

1989년 권중달은 3월에 중앙대학교 교수로 승진하여 현재에 이르다.
1990년

권중달은 중앙대학교 학생처장에 임명되다. 4월에는 중앙도서관장이 되어 1993년 2월까지 맡다. 아울러 중앙대학교 제1캠퍼스 중앙도서관운영위원회위원장이 되다. 9월부터는 중앙교육평가원의 문화사분과위원회 위원이 되다.

1994년 권중달은 3월부터 1995년 2월까지 중앙대 사학과 학과장을 맡다.
1995년 권중달은 3월부터 1997년 2월 중앙대 기획실장을 맡다. 원칙론자인 그는 기획실장 일은 처음 하는 것이어서 직원보다 일찍 나오고 늦게 퇴근하며 전력투구 하다. 또 그는 향후 30년~50년의 이 나라 문화 수준을 향상시킨다는 명분으로‘역사 대중화' 작업에 적극 나서다.
1997년

권중달은 1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중앙대학교 민족발전연구원 사무총장 겸 해외민족연구소소장을 지내다.

2000년 권중달은 12월 한국중앙사학회 회장이 되다.
2001년

권중달은 3월부터 현재까지 한국사학사학회 부회장을 지내다.

2003년 권중달은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중국사상사 강사를 지내다.
2004년 권중달은 7월부터 현재까지 고구려연구재단 자문위원을 지내다. 10월부터 한국민속박물관대학 강사를 지내다.
2005년

권중달은 한국사학사학회 회장이 되다.

2006년 권중달은 2월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에서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