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資治通鑑)』은 송나라 때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에 의해서 쓰여진 편년체(編年體) 통사(通史)이다. 『자치통감』이라는 말을 해석한다면 ‘정치에 자료가 되는 통시대적(通時代的)으로 거울이 될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이름은 송(宋)의 영종(英宗)이 붙여준 것이다. 처음에 사마광이 『통지(通志)』라는 이름로 8권 분량의 역사저술을 영종에게 지어 쳤더니 이를 『자치통감』이라는 서명을 하사(下賜)하였던 것이다.

이 책은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403BC>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위열왕이 즉위하는 해부터 쓰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 중간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데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마광은 송대에는 제왕노릇을 한 일이 없으면서도 문선왕(文宣王)으로까지 존경되었던 공자의 뒤를 잇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자치통감』은 공자가 써서 경전(經典)이 된 『춘추(春秋)』가 끝나는 시기를 이어 받아서 쓰지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 책에서는 『춘추』에서 다르고 있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역사는 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다음 시대인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다.

공자의 『춘추』가 나온 이후로 한나라 때의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썼다. 그런데 이 『사기』에서 공자가 썼던 춘추시대마저도 다시 썼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마천은 겉으로 공자를 존중한다고 말하였고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를 쓰는 방법에서는 오히려 공자가 쓴 시대도 자기가 다시 썼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고 공자는 『춘추』를 편년체, 즉 연도순으로 기록하였던 것에 비하여, 그는 사람 중심의 기전체(紀傳體)로 역사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로 인하여, 사마천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공자의 『춘추』는 역사책으로 인정받았으나, 『사기』가 세상에 나타난 다음에는 역사책이란 모름지기 『사기』처럼 써야하는 것으로 인식 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춘추』는 한층 더 높은 지위라고 볼 수 있는 「경서(經書)」가 되었지만, 역사책이라는 범주에서 본다면, 사마천에 의하여 공자는 역사가의 대열에서 쫓겨난 셈이었다.

이러한 사마천의 『사기』는 막강하였다. 그 후로는 하나의 왕조가 ‘올바른 역사책’이라고 정식으로 인정한 역사책인 정사(正史)는 『사기』처럼 「기전체」로 된 것이어야 했다. 이런하 상황은 송대(宋代)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마광은 역사책을 쓰면서 사마천 이후 거의 1100년간이나 지속되어온 기전체의 역사책을 쓰지 않고, 공자가 채용한 편년체로 이 『자치통감』을 썼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이 공자를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공자가 썼던 부분을 다시 썼던 것처럼, 사마광도 사마천 이후에 많은 역사가들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썼던 기전체의 정사(正史)에서 다룬 부분을 이 『자치통감』에서는 다시 썼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사마광은 공자의 『춘추』를 잇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쓴 것이 분명하다.

또 다른 의미는 사마광은 이 『자치통감』을 통하여 그가 살고 있던 당시에 불고 있던 이른 바 「개혁」바람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광이 살고 있던 시기는 송나라 서기 960년에 건국된 이후 근 100년쯤 지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북방에 있는 요(遼)나라, 서방에 있던 서하(西夏)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었다. 그리하여 국가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이때에 전쟁지역으로부터 떨어져있는 양자강 유역은 점차 개발되었고, 그 경제력에 의하여 이 지역 사람들이 점차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송나라를 이끌어온 서북지방 사람들의 보수성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되었으니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왕안석(王安石)이었고, 그가 이른 바 「신법(新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개혁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그 동안 정권을 잡고 송나라를 이끌어온 서북지역 사람들을 대표하여 사마광은 그 개혁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참으로 좋고 시원하게도 느껴지지만,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는 실제에 있어서는 모두 실패한다는 점을 안타깝게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점진적으로 고쳐 나가는 것이 혼란을 막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대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역사에서 찾으려 하였고, 이 『자치통감』을 통하여 이를 웅변하고자 하였다.

사마광은 신종이 죽은 후 노구(老軀)를 이끌고 잠깐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가 1086년에 죽는다. 이 해에 신법을 주창하였던 왕안석도 죽었지만, 그 후 북송의 정치적 실권은 개혁을 내세우는 신법당(新法黨)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에 의하여 정권은 농락되었다. 이렇게 개혁적 주장을 하는 신법당 인물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송나라가 부강해 지기는 커녕, 오히려 금(金)나라에게 황하유역을 내어 주었고, 황제도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그리고 강남지방에서 서기 1126년에 겨우 송왕조를 재건하는 나약한 왕조가 되고 말았다. 불과 사마광과 왕안석이 죽은지 4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은 신법당의 급진적 개혁조치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점진적 개선을 주장한 사마광이 쓴 이 『자치통감』의 내용은 현실적으로는 많은 귀감(龜鑑)이 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이 책은 널리 보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되자 『자치통감』을 절록한 보급형의 저서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치통감294권을 50권으로 줄여서 만든 강지(江贄)의『소미통감절요(少微通鑑節要)』이고, 주희(朱熹)의 『통감강목(通鑑綱目)』59권이다. 이러한 축약본들이 비교적 널리 읽혀질 수 있었다.

다시 남송조차도 150년쯤 지나서 1279년에 몽골족의 원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때의 호삼성(胡三省)이 스스로 송(宋)나라의 유민(遺民)이라고 자처하면서 『자치통감』에 자세한 주를 달아 보다 정확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한 주석서를 서술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에 사마광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비록 보수파라고 하여 공격을 받았고, 개혁파인 왕안석의 신법당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중국 민족의 수모의 역사 속에서 살던 선각자들 예컨대 강지와 주희같은 사람들은 이 책의 보급에 노력을 경주하였고, 몽골족에게 중국 전체를 내어 준 원대에는 호삼성이 망해버린 송 왕조를 슬퍼하면서 이 책에 주를 달았다. 다시 말하면, 당시에는 권력 싸움 속에서 밀려났지만 그 후로는 정말로 「정치교과서」정도로 가치 있는 책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자치통감』이 갖는 정치교과서적 의미는 잘 인식되었다. 『자치통감』은 중국에서 출간하자 곧 고려로 전해져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이 책을 참고로 하였다. 고려말에는 『통감』을 직접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왕들은 경연(經筵)을 통하여 읽게 하였다. 다시 세종대에는 『자치통감』을 보다 잘 읽을 수 있도록 훈의(訓義)를 달아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라는 책이 저작되었고 또한 국력을 기울여 간행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하였던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