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 교수는 경진년 11월 5일(음) 지금의 인천 계양구 갈현동에서 아버지 明圭 공(公)과 어머니 文順臨 여사 사이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난다. 이 때만해도 그 동네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경기도의 오지이고 기껏해야 몇 마지기 논농사와 밭뙈기를 경작하여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잔반(殘班)의 후예이다.

해방 전 해인 다섯 살 때에 부친을 잃고 나자 초등학교시절에도 벌써 지게를 지고 볕 짚을 나르거나 땔감을 구하러 산으로 갔지만 설날이 지나고 얼마 안 되는 시점부터 장리(長利)쌀을 빌려야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는 살림살이여서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꿈으로 여겼던 시절을 보낸다.

겨우 중학교를 진학하여 졸업하였지만 올망졸망한 조카들까지 10여 식구가 한 집에서 부대끼면서 그야 말로 입에 풀칠이 어려운 경험을 계속한다. 지레 질겁하여 고등학교 입학시험도 안 치자 20리 길을 걸어와서 입학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하시는 담임선생님의 정성에도 등록금이 무서워서 아무 소리 못하였던 경험도 한다.

모심고, 김매고, 벼 베는 농사일을 2년 돕다가 가형(家兄)과 함께 대처(大處)로 나오는 결단을 하고, 인천과 서울에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생활 속에서 주경야독의 고등학교 3학년 때에 5.16을 만난다. 군사정부는 대학을 정비해야 한다는 불같은 개혁 조치 속에서 대학정원만큼만 합격시키는 최초의 대학입학을 위한 국가고사(國家考査)를 치러 전교에서 겨우 한 명만 합격한 속에서 1962년에 중앙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한다.

대학생 시절에는 장학금을 받는 것이 가장 좋은 아르바이트라는 어느 교수님의 말씀이 귀에 솔깃하여 초등학생을 모아 과외선생을 하면서도 다른 곳에는 한번도 눈을 돌릴 틈을 못 갖는다.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우고, 당구장에도 들어 가 볼 여유를 못 가지며 졸업한다.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석사학위를 받고 나서 1972년에는 등록금이 없는 나라 대만으로 유학을 떠난다. 1973년에 그곳에서 유학생인 정철재(鄭哲在)라는 규수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여 초등학교 때의 염원을 1천 % 달성한다.

1976년에는 모교인 중앙대학교 전임교원이 되어 교직의 길을 걷는다. 다른 길을 가 보지 못하였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대학 교수가 된 후에도 다른 짓거리에는 소질을 보이지 못하고, 연구실 지키는 일만을 유일하게 편안한 것으로 안다. 고도리라는 화투 놀이를 배워 보고, 친구에 끌려서 골프장에도 몇 달 나가 보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늘 재미를 못 느낀다.

1987년에 대학의 주인이 바뀌면서 연구실에 파묻혀 있는 사람을 불러내어 보직을 맡게 한다. 그 후에 10년 정도를 연구행정과 도서관업무를 맡고 마지막으로 기획실 책임까지 맡아 보게 된다. 이 일은 전에 못해 본 일들이어서 직원보다 일찍 나오고 늦게 퇴근하며, 때로는 밤늦게 까지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면서 역시 옆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전력투구(全力投球)해 본다.

보직을 맡고 있는 동안은 개인의 사생활을 접어야 한다는 순진한 생각은 원칙론자로 만든다. 이 원칙주의는 때로는 적당히 넘어가려는 보통의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한 것을 알고 나서야 학교를 제대로 일으키려면 전부(全部)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로는 반대로 전무(全無)를 즐기기로 하고 향후 30년 - 50년의 이 나라 문화 수준의 향상을 위하여 할 일을 찾아 나선다.

이 때에 ‘역사의 대중화'를 통한 국민 문화 향상이라는 짐을 자임(自任)하기로 하면서,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는 사이에 정(定)해진 나이에 이르러서 퇴임을 하게 된다. 본업에만 전념하느라고 세 아이들에게 남들처럼 과외 한번 시켜 보지 못했지만 독립심만은 키우게 했으니 이 또한 고마운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