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7]

우리말로 만나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산 1

기구한 운명의 통치학 교과서

‘마침내’오늘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전 294권과 ≪자치통감≫이 끝난 다음의 역사진행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청(淸) 필원(畢沅)이 편집한 ≪속자치통감≫ 권1을 덧붙여 도합 295권의 역주를 끝내어서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겼다. 지난 30여 년간의 나의 학문적 염원인‘≪자치통감≫ 완역 출간’이라는 결실이 맺어지는 순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30년간, 짧게 말한다고 하여도 내가 이 작업에 본격적으로 매달린 것이 1997년이니, 13년간‘≪자치통감≫ 완역’이라는 큰 산과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그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는 고백이 진부한 표현인줄 알면서도 지금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을 만큼 힘든 일이었지만 ≪자치통감≫의 기구한 역사 속에 녹아있는 선학(先學)들의 노고에 비한다면 내가 그동안 겪은 어려움은 명함조차 내밀기도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난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류에게 남겨진 위대한 유산인 ≪자치통감≫을 만나는 행운이 내게 없었다면 어찌 나의 학문적 여정이 풍성했겠으며, 우리말로 옮기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부터 915년 전인 1084년에 완성한 ≪자치통감≫의 편찬은 사마광이 그의 일생을 건 작업이었다.
북송 영종(英宗)의 명을 받고 작업에 착수했다고는 하지만 19년의 긴 세월을 이 편찬 작업에 매달렸던 사마광은 그 대가로 눈이 어두워졌다고 한다. 또한 그 후에 간신히 판각이 이루어졌다고 하니, 지고지난한 과정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남송 말에 사마광을 반대하던 신법당 인사들이 어렵게 완성된 ≪자치통감≫의 누판(鏤板)을 부수어 버리자고 훼판(毁板)까지 논의하였다니, 이렇게 위대한 문화유산인 ≪자치통감≫은 태어나고도 그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여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이 이런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은, 이 책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야 당연히 휴지조각보다 못하다고 하여 무심하게 대우했겠지만, 이 내용이 많이 알려지면 입지가 어려워질 사람들이 이 책이 남게 되는 것을 극구 반대하며 없애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자치통감≫이 다시 태어난 것은 ≪자치통감≫이 완성된 이후 200여 년이 지나 호삼성(胡三省)에 의해서였다.
호삼성은 남송 말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이민족 몽고에 의하여 중원이 점령되는 아픈 세월이 이어지자 사환(仕宦)의 길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서 오직 ≪자치통감≫의 음주작업에 온 힘을 기울인 사람이다.
그러나 호삼성(胡三省)의 작업도 순조롭지 않았다. 병란(兵亂)을 맞아서 작업해놓았던 원고를 몽땅 잃어버리기를 세 번씩이나 겪었다. 음주한 원고를 소실하였을 때의 호삼성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나도 써 놓았던 원고가 컴퓨터에서 지워져버리는 경험을 한바 있었는데, 얼마 안 되는 분량이라고 하더라도 원고를 잃었을 때에 느끼는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는 원고를 손으로 한 자 한 자 써야만 하였던 시절이라 써놓은 원고를 고스란히 잃어버렸을 때의 허탈감은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거니와 원고를 잃어버린 것이 무려 세 번이나 되었다니, 호삼성은 나로서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기어이 이 ≪자치통감≫의 음주를 마쳤던 것이다.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탄생한 호삼성의 ≪음주자치통감≫도 다시 몇 백 년이 흐르면서 중간에 판각되는 일이 있었지만 소실되는 일 또한 많아서 19세기 초에 왔을 때에는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자치통감≫을 온전하게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청대 호극가(胡克家)가 원각본(元刻本)을 중간(重刊)하면서다. 호극가는 원대 이후의 낙질(落帙)로 된 것들을 모아 잇고, 교정하고 고쳐서 다시 완전한 내용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100년쯤 지난 20세기 초에 장옥(章鈺)이 다시 교정하여 완성하였다.
≪자치통감≫의 대략적인 역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자치통감≫에는 고비 고비마다 ≪자치통감≫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시간과 재산을 다 바친 모습들이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내가 편히 이 책을 볼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 정말로 난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조선왕조의 가장 위대한 군주인 세종(世宗)은 이 책이 치자(治者)에게는 반드시 읽혀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손수 ≪자치통감훈의(訓義)≫를 지어서 간행했다. 세종이 ≪자치통감훈의≫ 교정을 보느라 안질이 생겼고, 훈의를 다는 과정에서 호삼성의 음주를 구하지 못하여 백방으로 주선하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이런 ≪자치통감≫을 우리말로 완역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읽을 수 있게 하는 작업을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호삼성(胡三省), 호극가(胡克家), 장옥(張鈺), 세종대왕의 고난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이 점에서 역시 난 행운아다.
이렇게 행복한 조건을 갖고 작업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다시 얼마간의 어려웠던 과정을 덧붙여 설명한다 하여도 선학들이 겪었던 어려움에 비한다면 부끄러울 수준이고, 선학들이 나의 이 행복한 환경 속에서 일했다면 아마도 몇 배의 더 좋은 결과를 인류에 주었을 것으로 생각하면 나의 천학비재(淺學菲才)함이 더 커 보인다.
그럼에도 ≪자치통감≫을 완역하였다는 또 다른 역사의 한 장을 쓰게 되었다는 감격과 행복을 솔직히 숨기지 못해서 여기에 후기(後記)를 단다. 이 작업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 보는 것도 또 다른 역사적 작업이라고 생각되어서다.

[2015/11/03]

한국사 교과서 전쟁에 붙여

온 나라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전장(戰場)이 되어 있다. 막말이 서슴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한국사교수 90%가 좌파라든가 역사학자는 무식하다든가 아니면 친일 미화(美化)로 하려는 술책이라든가 정말로 듣기 민망한 말들이 오고 간다. 게다가 또 양쪽에서 성명서가 난무한다. 이러다가는 한국은 한국사 교과서 문제는 모든 일을 다 접어 두고 해결해야할 급선무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리고 찬성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역사의 왜곡(歪曲)을 반대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즉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행위는 바로 역사를 제대로 보지 않고 삐뚜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강수를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문제를 그렇게 하루아침에 밥 먹듯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이해하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고 그것이 합리적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합리적으로 되려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교육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근대 사학은 역사는 과학(科學)으로까지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만큼 합리성을 가진 자료의 수집과 해석을 요구하고 이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역사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연구를 위하여 보다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정치한 논리를 찾아내려고 하고 있다.
우리의 근대는 국권이 열강에 의하여 침탈되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에 우리민족의 단결과 이를 통한 독립과 자주, 즉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역사가 중시되었다. 우리가 비록 열강에 침략을 받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위대한 선조들이 있었다. 그러하니 다시금 선조들을 본받아 독립을 쟁취하자는 뜻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해석도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투쟁 사관(史觀)이 대종을 이루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의 효과를 가져 온 것이 사실이지만 역사를 정말로 인간이 서로 투쟁하는 것만으로 진행되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懷疑)는 떨쳐 버릴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서로 협력하고 단결하고 도우면서 평화스럽게 공존하는 방식을 더 많이 사용해 온 것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투쟁 사관은 일시적 필요성이 있었다고 치더라도 그것으로 인류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필요한 일단의 시기도 역사적 과정으로 본다면 그 시기가 지나가버리면 역시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보아야 하고, 그러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 만약에 하나의 사관을 변함없이 가지고 역사를 봐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역사학은 아니고 이념이 되고, 종교가 되기에 십상이다.
우리가 역사를 종교로 만든다면 역사라는 말 대신에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말로 고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역사교과서라고 하지 말고 이데올로기 교과서라고 해야 사실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에 역사를 이데올로기를 교육하기 위한 과목으로 설정하려고 한다면 이는 표리부동한 것이다. 겉으로는 공평무사한 역사라는 껍질을 쓰고 속으로는 이념을 가르치려는 음흉한 음모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독립 정부를 구성한지도 이미 70년이 흘렀고, 이제 전 세계와 교류하며 서로 협조하며 살게 된 지금에도 여전히 ‘한국사’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 속에 던져진 한국은 여러 다른 나라를 이해하고 협조하며 상생(相生)의 길을 찾아야 하며, 더욱 자라는 청소년에게는 이것이 더욱 절실한데, 아직도 ‘한국사’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흔히 한국사는 ‘우리’의 역사이니 이것을 몰라서야 되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의 것을 찾아내고 우리의 피 속에 흘러 내려오는 DNA를 아는 것은 우리의 정체(整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것, 내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결국 우리 집안, 선조(先祖)를 알아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그러면 종친회에서 우리 집안에는 영의정 몇 명 나왔다고 자랑하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만약에 한국사 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우리 조상들의 빛난 업적을 가르치려는데 멈춘다면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하나는 지나치게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믿는 나머지 다른 민족을 깔보는 선민의식을 가져 올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지난 세기의 두 번에 걸친 대전(大戰)을 불러 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역사교육이 낳은 편견의 피해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영광스런 역사와 현재를 비교할 때에 현재를 사는 우리가 지나치게 자괴감을 가져 올 수가 있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엄청난 업적과 영광을 누렸는데, 지금 그렇지 못하다면 점점 못살아 가는 기울어져 가는 민족이라는 생각을 낳을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사 교육이 선조의 자랑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굳이 역사교육을 한국사에 국한하거나 이를 강조하여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한국사 교육을 통하여 나와 연관되어 있는 진영의 논리를 펼치려는 태도이다. 하나는 일본의 한국 침탈과 관련하여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와 그 후예를 발본색원하여야 한다든가, 우리 근대사에 있었던 독재자와 재벌 등을 거론하면서 이를 증오하는 내용으로 짜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어떤 사람의 일생을 완전 선(善)과 완전 악(惡)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태도는 역사의 과장성(誇張性)이다. 잘했다고 평가 받는 인물에 대하여서는 모든 것이 훌륭했고, 조금도 잘 못은 없었던 것처럼 기록하거나, 잘 못했다고 평가되는 사람에게는 그가 한 모든 일이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과장이고, 왜곡인 것이다. 잘한 사람도 못한 사람도 각기 공과(功過)의 비중이 다를 뿐인데, 한쪽만 강조하는 것은 역사교육에서 타기(唾棄)해야 할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역사를 교육한다면 결국 분열을 가져 올 수밖에 없다. 합리성이 결여된 기록과 평가는 진영(陣營) 논리가 되어 무기가 된다. 역사지식이 투쟁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면 이미 이러한 역사 지식은 역사 지식이 아니라 이념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념의 도구인 역사를 가르칠 필요는 없다. 역사는 이념을 뛰어 넘어 그 이념이 탄생하는 원인과 결과 그 영향까지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길러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교과서를 두고 충돌하는 두 진영의 태도는 어느 것일까? 그들에게 한국사를 왜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만약에 위의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면 과감하게 한국사교과를 빼어 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 적어도 우리 사회를 두 쪽으로 갈라놓는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증오하는 비도덕적이고 비인격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중지시킬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한국사를 배워야 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정말 한국사 공부를 통하여 앞서 말한 것처럼 의도대로 우리의 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될까? 정말로 배우는 대로 믿고 진영논리에 순응할까? 오히려 아무런 쓸데없는 비실용 과목인데, 점수를 따기 위하여 마음에도 없는 연대를 외우고 사람이름을 외운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은 되지 못하면서 짐만 지워주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러한 교과목은 과감히 없애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태대로라면 한국사 교과목을 설치하지 않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한국사 교육을 정치인들의 이념투쟁의 장이 되고 학생들에게 무거운 짐만 안겨준다면 도대체 왜 존치하여야 할까? 아주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아무 필요 없는 과목을 설치해 놓은 것은 교과서 업자, 참고서 업자, 그리고 이와 관련 있는 교사들의 직장을 보장해 주는 정도의 긍정적인 기능이 있을 뿐이다. 이들을 위하여 없애야할 과목을 존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모든 나라에서 역사교육을 하고 있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이념의 하수인이 되게 하려고 역사를 가르치거나 얼마간의 경제적 이익 집단을 위하여 이 과목을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역사를 가르쳐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이다. 나서 죽을 때까지 100년 동안 수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변화에 부딪혀 당황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또는 변화를 틈타서 일약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간에 따라서 인간들의 생각과 활동의 총체로서의 변화를 짐작한다는 것은 개인이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변화의 경향이나 방향을 알아서 낙후된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시간과 함께 변하는 인간 총체의 모습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역사 공부는 가능한 한 아주 폭넓게 또 장기간에 걸친 인간의 생각과 활동의 총체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마치 100개의 자료를 근거로 낸 결론보다, 10,000 개의 자료를 가지고 내린 결론이 더 정확한 것처럼, 보다 넓게, 보다 깊게, 보다 장시간을 대상으로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그래서 보다 정확한 변화의 경향을 안다면 개인으로서 이 변화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아주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는 태도를 갖는다면 역사공부는 다시 비실용적인 학문이 아니고 필수 실용학문이 된다. 배우는 사람도 역사교육을 통하여 자기의 인생을 설계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연대도 자연스럽게, 인물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외워진다. 역사 공부는 하면 할수록 미래에 대한 조망도 분명해 지는 감을 얻는다.
그러하니 한국사에 국한한 역사교육은 이미 그 자체로 한계가 있다. 아시아 속에 있는 일부분이 한국인데, 한국만 떼어내어 역사교육은 가능하지 않다. 또 세계 속에 일원인 한국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에 대한 이해가 절대로 필요할 것이라면 한국사가 아니라 세계사여야 하는 것이다. 한국사 교육만으로 인간총체로서의 변화 모습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그러므로 과감하게 한국사의 굴레를 떼어 버리고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어디를 공부하여도 역사 속에는 변화에 따른 인간 군체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역사를 보아야 하는지? 과학적 방법으로 어떻게 역사를 검증해야 하는지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치 물리학에서 교실 안에서 물건의 낙하실험 방법을 가르친 다음에 각자 얼마든지 다른 곳에 실험할 수 있고, 그 결과를 응용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를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현재의 역사교육이란 이미 내려진 결론은 주입식으로 가르치고 암기하게 하는 방법이므로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이를 이용해 보려는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방법을 안다면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설사 유혹하여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역사는 역사로서 독립하게 된다. 당연히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유치하기까지 한 역사전쟁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새롭게 한국사 교육을 포함하여 역사교육의 새로운 틀을 짜는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교과서도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결과가 나오게 된 과정과 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치 고기를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역사교육에도 필요한 것이다.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2015/06/22]

문화공로상 수상

권중달 중앙대 역사학과 명예교수(74)가 6월 9일 11시 타이완 타이페이에서 중국문화총회(회장 劉兆玄 명예회장 馬英九 총통)로부터 문화공로상을 받았다. 권중달 교수의 이번 수상은 13년의 각고 끝에 2010년에 완간된 『자치통감』 294권 한글완역본을 출간한 문화적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다. 한글 번역 원고량만 200자 원고지 8만 매에 이르는 방대한 작업인 『자치통감』 한글완역본은 2005년에 시작하여 5년만인 2010년에 비중국어문자로는 최초로 완역된 바 있다.
권중달 교수는 『자치통감』 연구 권위자로 국내외에 알려져 있으며, 석, 박사 논문을 모두를 『자치통감』에 관한 것으로 썼으며, 중앙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에 유학했다.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6년에 정년퇴직하여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타이완의 중국문화총회는 1950년대에 장개석이 타이완으로 온 이후 중국문화의 발양을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감안하여 장개석이 직접 조직하고 회장을 겸직하면서 중국문화의 발양에 기여해 왔다. 그 후로 이 단체의 회장은 총통이 겸임하거나 퇴임 총통 혹은 퇴임행정원장이 회장을 맡아서 이 회를 이끌어 왔다.
중국문화총회에서는 권 교수가 한국에서 『자치통감』을 한국어로 완역하고 이의 고전적 가치를 새롭게 해석하고 보급한 공로는 동양문화를 세계에 발양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하였으며, 연전부터 이미 타이완 언론계에서도 주목을 받아왔다고 하였다.
권 교수는 『자치통감』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책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역사이고, 인류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문명이 진보하고 인간이 대처하는 모습의 변화 경향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책의 하나라고 강조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가운데 특히 고구려본기는 거의 3분의 2 정도는 자치통감에서 인용하여 쓰인 것임을 발표한 일이 있는 만큼 자치통감을 모르고 우리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반쪽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권교수는 이 자치통감의 한국어로의 완역을 통하여 문화콘텐츠의 보고를 한국에 제공한 것이며, 이를 이용하여 한국 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 시상식 자리에는 학국을 대표하여 주타이완 대표부의진기훈  부대표 와  권교수의 모교인 정치대학 총장을 비롯하여 문화계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2015/06/04]

인문학 산책
KBS 제1라디오
인문학 산책
*고전의 숲(0608)

6월 8~ 10 3일간 각 30분씩
자치통감을 읽으면서 대답합니다.
[2015/06/04]

천안문 사건 26주년에 팡리즈를 떠올린다
[왜냐면] / 한겨레 :2015-06-03 19:10

6월4일은 중국의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달하였던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지 꼭 26년이 되는 날이다. 1989년 5월말부터 계속된 베이징 학생 시위는 급기야 중국 당국이 군대를 동원하여 6월4일에 이를 진압해 전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때 중국 당국은 학생 시위를 배후조종하여 중국을 배반한 사람으로 팡리즈를 지목하였다. 중국이 낳은 세계적 천체물리학자인 팡리즈는 앞서 학생들에게 민주화 강연을 한 것을 이유로 공산당은 물론 대학에서도 쫓겨나 베이징 천문대로 가야 했다. 그는 사건 당시 중국 당국의 검거를 피해서 주베이징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가 13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끝까지 ‘중국 헌법’에 보장된 자유를 주장하면서 버티다가 1990년 6월25일에 베이징에서 미국 군용기에 몸을 싣고 중국을 떠남으로써 중국은 애국자이자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를 잃었다.

팡리즈는 중국에 ‘주의’(主義)가 지배하는 한, 학문조차 주의에 지배받게 되어 중국의 현대화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연설하고 다녔다. 그의 연설은 중국 당국의 말대로 선동이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학자로서 자유로운 연구를 하기 위해 민주와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외친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서세동점의 환경 속에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1919년 5·4 신문화운동이 전개되면서 베이징대학의 천두슈(陳獨秀)는 전면적 서양화를 의미하는 데모크라시, 즉 덕(德) 선생과 사이언스를 의미하는 새(賽) 선생을 중국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로 꼭 70년 만에 ‘민주’와 ‘과학’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팡리즈가 나타났고, 다시 베이징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압되었고, 다시 언제 민주화와 자유화의 열망이 현실화될지 가늠할 수 없다.

중국 당국이 천안문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한 팡리즈도 벌써 몇년 전에 타계했다. 중국도 많은 변화를 거쳐서 지금은 G2로서의 지위를 누리며, 겉으로는 미국과 양강 구도를 이루며 세계를 이끌고 있다. 야심찬 새 실크로드 계획을 통해 모든 길을 중국으로 연결시키려 하고 있다. 중국이 굴기하였음을 보여주는 징표인지 모른다.

그러면 민주주의와 자유를 도입하지 않아도 중국은 발전하고, 세계의 리더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까? 팡리즈의 주장은 실정을 모르는 지식인의 주장이었을까? 우리는 중국의 두 얼굴을 지금 경험하고 있다. 이른바 유커(중국 관광객)들이 명동 한복판에서 명품을 싹쓸이하며 돈을 물 쓰듯 하는 모습과, 불법입국을 해서라도 한국에 들어와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중국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중국이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이 양극화한 모습을 서울에서 보면서, G2로 자리매김한 중국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중국이 정말로 정치를 잘하는 것일까? 그래도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향상된 것은 마오쩌둥, 덩샤오핑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훌륭한 지도자 덕분인가? 사실 역사를 올라가 보면, 한무제, 수양제, 당태종 시절은 성군이 지배한 멋진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시대 우리는 침략을 받았고, 이를 잘 극복한 역사를 갖고 있다. 침략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고생을 안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왕조도 그렇게 급격히 기울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침략자나 침략을 당한 자나 막대한 손해를 당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왜 침략을 했을까? 성군론 뒤에 숨은 비판의 금기시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조차 성군(?)의 결정에 대해 그 후과(後果)를 알면서도 비판을 못했던 것이다.

중국은 공산혁명을 하였지만 천안문 사건 이후에도 아직 성군론이 지배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마오쩌둥, 덩샤오핑에서 현재 시진핑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보면 ‘지도자 동지’란 성군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현대사에서도 성군론이 지배하던 나라가 있었다. 2차대전을 일으켰던 일본과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그 결과는 지도자 자신뿐 아니라 그가 속한 나라와 국민에게도 엄청난 비극을 안겨주었다. 지식인은 당연히 경고해야 했다. 그래서 천안문 사건 때 팡리즈는 위로부터 주는 민주화는 민주화가 아니라고 외쳤다. 그의 망명으로 이 주장은 실현되지 못한 채 화두로 남아 있다.

성군론이 지배하고 민주화가 화두인 이웃나라에 대해선 경계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지금의 중국에 아직도 성군론이 대세를 이룬다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군론이 갖는 비판불가가 역사에서는 항상 오판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고 팡리즈가 망명한 6월에 다시 한번 중국의 민주화 정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권중달 중앙대 역사학과 명예교수
[1][2][3][4][5] 6 [7][8][9][10]..[28] >>
Login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Z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