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8]

완간, 그러나 끝나지 않은 수정보완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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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나 같이 융통성이 적은 사람이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한다는 것은 힘에 겨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융통성이 없기에 한국 출판사상(出版史上) 그리 쉽지 않은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작업은 아마도 세종대왕 같이 국가의 모든 역량을 다 기울여서야 가능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중국을 점령한 쿠빌라이가 이 책을 보고 몽골어로 번역하게 하였던 점을 보면, 나와 우리 가족이 이 일에 매달린 것은 만용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나 고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이 책이 계속 출간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독자들이 전화를 걸어서 다음 출간 기일을 독촉하였다. 어떤 때에는 나의 홈페이지에 와서 격려하고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간혹 어떤 모임에 가면 이 책을 사들고 와서 나에게 서명을 받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또 이 책이 출간 되면서부터 ≪자치통감≫을 인용하여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분들이 모두 내 번역본을 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여간 내가 이 책을 출간하면서부터 부쩍 ≪자치통감≫을 인용하여 글 쓰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더 큰 기대는 앞으로 연구자들이 이 책이 나옴으로 하여 사료의 전부를 통독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을 찾아서 연구하는‘색인연구(索引硏究)’의 나쁜 관습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이다.‘색인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여서 그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까닭이 없을 터이니, 이것을 통하여 원전을 빨리 읽고 전체의 역사 흐름을 이해하고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도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니 전문가들이 전문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역사에 대한 안목을 높게 하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의 역사학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문화산업의 세기라고 하는 21세기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필요한데, 우리나라에 동아시아에 있었던 수많은 인간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 책은 문화산업의 기초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와 우리 가족은 21세기 우리나라 문화산업의 기초를 놓는 일익을 담당한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지금 번역을 마치고 ≪자치통감≫ 32책인‘해설편’을 쓰려고 제주대학교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고 있다. 이 작업을 하면서 나와 내 가족이 이 일에 종사하고 있지만 크게 본다면 결국은 우리나라가 나에게 이 일을 할 수 있게 전체적으로 도와 준 것을 느낀다. 연구비를 주어 초역작업을 하게 해준 것과 책이 나오면 밤낮을 잊고 이 책을 읽고 있다는 독자들의 편지를 받으면 오히려 내가 그분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작업이 완벽한 것이 아니어서 끊임없이 수정을 해야 하겠고, 이 작업이 비록 외로운 작업이라고 하여도 내가 이 길을 계속 갈 만한 충분한 이유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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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7]

퇴직금 털어 출간비 마련


대만 여행에서의 감동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치통감≫ 번역 원고와 마주하고 있었지만 나는 사마광과 신종의 잔영(殘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두드리는 자판에서는 자꾸 오타가 났고 생각은 허공을 헤매었다.  
그러는 사이에 몇몇 출판사에서 이 책의 출판과 관련하여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자기 출판사 사장을 설득하려고 하는데 인세를 책으로 받으면 안 되겠느냐고 제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인세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출판사가 과연 32책을 끝까지 내 줄 수 있을지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동료 교수의 출판기념회에 갔다가 유수한 출판사 사장을 만났다. 그 사장 역시 대뜸 자기 출판사에서 책을 내겠다며 당장 원고를 달라고 했다. 상당한 재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출판사여서 그 사장의 제안에 솔직히 솔깃했었다. 아, 드디어 책을 내게 되는구나. 그러나 얼마 후 그 사장은 내 연구실로 찾아와서 계약은 당장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작업이 걸려 있으니 출판은 2년 뒤에 하자고 한발 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다음에 내가 다시 한 번 연락을 하였지만 다른 반응이 없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기존의 출판사와 이 책의 출판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는 것은 오히려 내 마음만 다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또 하나는 저자를 대하는 출판사들의 관행(?)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동안 나는 몇몇 출판사에서 책을 낸 경험이 있는데, 그 중에 어떤 출판사는 나의 책을 얼마나 찍었는지 저자인 나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고, 인세에 대한 리포트도 없었다. 물론 따져서 물을 수도 있지만 출판사의 상도덕을 믿었기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간이 너무 흘러 말하는 것조차 머쓱해질 것 같아 그만두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런저런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오직 책 만드는 데만 몰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나하고는 같은 학과 출신으로, 내가 정년퇴임하면서 그 동안 써 온 잡문을 모아서『역사를 통한 세상 보기』라는 책을 묶어 준 인연을 갖고 있었던 조성일 선생을 만나 ≪자치통감≫ 출판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와 상의하면서 결국 32권을 출판사를 바꾸지 않고 안심하고 출판하려면 결국 자비로 하는 것만이 유일한 보장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자비출판이란 말이 쉽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수억 원이 소요될 출판비용이 문제였다.
그래서 아내와 상의를 하였다. 내가 정년하면서 받은 퇴직금을 털자는 것이었다. 아내도 쾌히 승낙하였다. 그동안 가난한 교수를 내조하면서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했던 액수의 퇴직금을 받았으니 쓸 곳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비록 전권을 출판하기에는 반도 안 되는 액수지만 책을 출판하여 팔리면 그 자본으로 나머지 책을 내면서 부족한 자금을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며 아내를 대표로 하고 출판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처음부터 우리의 예상과 빗나갔다. 현금을 들여 책을 만들어 공급하였으나 수금은 부지하세월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저질러진 일이고 제작비에 무심한 나는 계획대로 원고를 넘겨 제작을 진행하였다.
아내는 제작비 충당을 비롯한 궂은일을 도맡아 묵묵히 해오고 있다. 또 출판사 운영경비를 줄이기 위하여 모든 잡다한 사무와 교정, 진행 업무는 딸의 차지가 되었다. 온 가족이 시간과 돈을 ≪자치통감≫의 출판에 바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어떤 높은 사람은 중간에 사람을 넣어서 이 책을 기증받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오기도 하여 마음을 씁쓸하게 했다.
결국 2년을 버티고서 드디어 자금 회전이 어려워졌다. 일생동안 한 번도 은행에 가서 대출을 신청해 본 일이 없는 아내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완간, 그러나 끝나지 않은 수정보완 작업

이 시대에 나 같이 융통성이 적은 사람이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한다는 것은 힘에 겨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융통성이 없기에 한국 출판사상(出版史上) 그리 쉽지 않은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작업은 아마도 세종대왕 같이 국가의 모든 역량을 다 기울여서야 가능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중국을 점령한 쿠빌라이가 이 책을 보고 몽골어로 번역하게 하였던 점을 보면, 나와 우리 가족이 이 일에 매달린 것은 만용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나 고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이 책이 계속 출간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독자들이 전화를 걸어서 다음 출간 기일을 독촉하였다. 어떤 때에는 나의 홈페이지에 와서 격려하고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간혹 어떤 모임에 가면 이 책을 사들고 와서 나에게 서명을 받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또 이 책이 출간 되면서부터 ≪자치통감≫을 인용하여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분들이 모두 내 번역본을 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여간 내가 이 책을 출간하면서부터 부쩍 ≪자치통감≫을 인용하여 글 쓰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더 큰 기대는 앞으로 연구자들이 이 책이 나옴으로 하여 사료의 전부를 통독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을 찾아서 연구하는‘색인연구(索引硏究)’의 나쁜 관습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이다.‘색인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여서 그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까닭이 없을 터이니, 이것을 통하여 원전을 빨리 읽고 전체의 역사 흐름을 이해하고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도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니 전문가들이 전문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역사에 대한 안목을 높게 하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의 역사학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문화산업의 세기라고 하는 21세기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필요한데, 우리나라에 동아시아에 있었던 수많은 인간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 책은 문화산업의 기초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와 우리 가족은 21세기 우리나라 문화산업의 기초를 놓는 일익을 담당한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지금 번역을 마치고 ≪자치통감≫ 32책인‘해설편’을 쓰려고 제주대학교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고 있다. 이 작업을 하면서 나와 내 가족이 이 일에 종사하고 있지만 크게 본다면 결국은 우리나라가 나에게 이 일을 할 수 있게 전체적으로 도와 준 것을 느낀다. 연구비를 주어 초역작업을 하게 해준 것과 책이 나오면 밤낮을 잊고 이 책을 읽고 있다는 독자들의 편지를 받으면 오히려 내가 그분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작업이 완벽한 것이 아니어서 끊임없이 수정을 해야 하겠고, 이 작업이 비록 외로운 작업이라고 하여도 내가 이 길을 계속 갈 만한 충분한 이유는 있다.
[2015/11/17]

사마광·신종과의 운명적 만남

나는 2006년 2월에 교수직 30년을 마감하는 정년을 맞았다. ≪자치통감≫ 역주작업은 실제로 기초 작업만 이루어진 채 교직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작업의 완성은 당연히 이 원고를 책으로 묶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출판이라는 게 한 두 권짜리 단행본도 쉽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꽤 두꺼운 책으로 적어도 서른 권이 넘는 방대한 규모였기 때문에 출판의 기회가 언제 찾아올지는 몰랐다.  
그러나 강단으로부터 해방된 난 역설적이게도 그때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매달릴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그리하여 나는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들여 출판을 염두에 두고 더욱 철저하게 원문을 대조하며 작업을 진행해나갔다. 언제 출판을 시작하게 될지는 모르더라도 기회가 되면 즉시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만은 철저하게 미리 해놓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 가운데 그해 2월에 타이완(臺灣)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북종화(北宗畵)를 부활시킨 김태신 화백(畵伯)이 대만의 고궁박물원을 보고 싶어 하였다.
김태신 화백은 우리나라 신여성 가운데 한 사람인 김일엽(金一葉) 스님의 출가하기 전에 낳은 아들이다. 그때 이미 여든다섯 살의 고령이었는데도 여전히 그림 작업에 몰두하는 분이었다.
그 분과의 인연은 길지만 특히 내가 중국선종답사단을 꾸려서 중국의 선종(禪宗) 유적지를 답사할 때에 노구(老軀)를 이끌고 참여하였고, 또 함께 일본의 고야산(高野山) 여행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이분과 대만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보고 싶은 고궁박물원을 잠깐 밖에 보지 못하여서 다음 기회를 보자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정년을 한 김에 함께 여행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꼭 나만을 위한 여행이라고 하기보다는 김태신 화백을 위한 여행이었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고궁박물원에 갔다. 그 당시 고궁박물관은 3년간의 수리를 마치고 다시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마침 재개관기념으로 북송시대 자료를 특별 전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여행을 결정한 것이어서 장대천(張大千)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나서 고궁박물원의 북송특별전 전시실에 들어섰다. 별 기대 없이 북송전시실에 들어선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전율을 느꼈다. 그때 나는 그 전시실을 무심코 순방향이 아닌 역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바로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사마광의 재상임명장인 제서(制書)였다. 모두 80여 행(行)으로 되어 있었고, 앞에는 사마광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다. 당시에 재상을 임명하면서 부서(副署)하였던 여러 사람들의 수결(手決)도 선명하였다.
재상임명장이란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청대에 이 임명장에 사마광의 초상화를 붙였다는 설명이 있었다. 여하간 하나 밖에 없을 임명장을 그 순간에 본 것이다. 사실 대만의 고궁박물원의 서화는 워낙 수량이 많아서 한 번 전시하면 그것이 다시 언제 전시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 내가 보지 못하였다면 나로서는 아마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것이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의 재상 임명장을 읽어나갔다. 나와 함께하였던 일행은 나의 설명을 듣고 놀란 듯 함께 천천히 감상하였다.
사마광의 재상임명장을 다 보고 다시 방향을 돌려 보니 거기에는 대형 초상화 석 장이 전시되었다. 하나는 송 태조 조광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종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거란에 잡혀간 비운의 황제 휘종의 것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신종(神宗)은 사마광의 책에 ≪자치통감≫이라는 서명(書名)을 하사하였으며, 직접 서문을 쓴 황제였다.
≪자치통감≫은 사마광과 신종 두 사람의 힘으로 탄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이 두 사람의 제서(制書)와 초상화를 직접 본다는 것은 내가 바라고 노력하여도 쉽게 얻기 어려운 기회였다. 그런데 이렇게 의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과 내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함께 여행하던 아내가 나에게 말하였다.‘아마도 사마광과 신종이 당신을 부른 것 같네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묘하게 이러한 기회를 가질 수가 있겠어요?’하였다. 나도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이 분들은 비록 900여 년 전에 이 세상을 하직하였지만 그들의 업적인 ≪자치통감≫의 완역에 매달린 나를 불러서 대화하고자 한 것처럼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 그분들과 대화하였다.
“≪자치통감≫은 중국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역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어서 이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작을 남겨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이 작업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2015/11/17]

학진 지원으로 역주팀 구성하여 작업


≪자치통감≫을 번역하면서 번역의 주안점을 처음에는 독자들과의 소통에 방점을 찍었었다. 어떤 형식으로 번역을 할 것이냐를 놓고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 독자들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시대와 진(秦) 왕조시대를 다룬 1권부터 8권까지를 번역하여 낸 첫 책 ≪자치통감≫‘전국시대 편’은 본문 속에 설명을 넣어서 번역하였다. 독자들이 각주가 달린 글을 읽기가 불편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방식을 ≪권중달 역주 자치통감≫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원문에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와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원문의 맛을 살리기 어렵다는 한계에 봉착한 것이었다.
그래서 2002년에 출간한 ≪자치통감≫‘전한시대’편 세 권은 번역 방식을 바꾸어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미주로 처리하였었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필요할 때마다 책 뒤편에서 설명을 단 주(注)를 찾아 읽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 책은 각주를 다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굳이 미주로 처리하지 말고 곧바로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 독자를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던 차 마침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자치통감≫ 역주 작업자를 공모하였다.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혼자서 이 큰 작업을 감당하기보다는 후학들과 함께 하는 것이 여러 모로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해서 난 평소에 내가 구상해두었던 연구자들을 망라하여 팀을 꾸려서 연구비 신청을 하였고, 여러 경쟁 팀 속에서 우리 팀이 선정되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 작업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모두 중국사를 전공한 박사학위 소지자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은 바로 대학전임교수가 되는 경사도 있었다. 연구자들은 함께 1년에 80권 이상씩 번역(200자 원고지 25,000매 분량)하여 넘기면 내가 원문과 대조하며 두 번 이상 교정을 거쳤다.
또 이 작업에는 학술진흥재단의 규정에 따라서 박사과정, 석사과정, 학부학생들을 참여시켜 장학금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어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동시에 매주 한 번씩 모여서 두 시간씩 ≪자치통감≫을 강독하면서 가르칠 수 있는 기회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팀은 2005년 12월에 200자 원고지로 8만 매에 달하는 완역된 보고서를 한국학술진흥재단에 냈다. 사실 예산지원은 2005년 8월까지여서 그들에게 완전한 보고서를 낼 때까지 작업에 참여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못한 채로 받아서 내가 메우고 교정하면서 다시 넉 달을 고군분투한 결과였다.

[2015/11/17]

역사학 대중화 위한 첫걸음

석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명말청초를 살았던 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으로 잡을 때만 하여도 나는 ≪자치통감≫에 대하여 너무도 막연한 생각을 품었었다.
그러나 석사학위를 마치고 대만으로 유학하여 그곳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 역시 ≪자치통감≫에 관해 쓰면서부터 ≪자치통감≫은 내 학문의 동반자가 되었고, 이후 학자로서의 나의 삶은 ≪자치통감≫을 뒤적이며 논문을 쓰고, 이것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 우리 학계에서는 ≪자치통감≫의 진가를 그리 깊숙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컨대, 같은 사건이라도 이른바 정사(正史)라고 불리는‘25사’를 인용하면 대단히 원사료에 충실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자치통감≫을 인용하면 마치 2차 사료(史料)를 인용한 것처럼 취급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난 당시 내가 쓰는 논문들은 아무도 인용할 가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치통감≫만큼 철저하게 사료를 분석하고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아 가면서 쓴 역사서가 드물거니와 역사학의 역사에서 보아 ≪춘추≫와 ≪사기≫에 이어서 역사를 새로운 방법으로 쓰였음을 감안하여 극찬은 고사하고 오히려 소홀히 대하는 게 나는 이상했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자기가 쓰고자 하는 부분에 관련된 사료만을 모아서 논문을 쓸 뿐 역사 전체의 흐름을 파악한 위에 자기가 연구하는 주제의 위치를 가늠하지 않는 연구의 경박성(輕薄性)에 있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것은 발달한 공구류(工具類)에 기대어 인덱스 논문을 써서 논문 숫자를 늘리기에 바쁜 세태가 한몫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가령 한대사(漢代史)를 연구하는 사람조차도 소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사기≫, ≪한서≫, ≪자치통감≫을 통독(通讀)하지 않고 논문을 쓰려는 업적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는 중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소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한문(漢文)자료를 그리 쉽게 읽어내기 어렵다는 기초교육의 한계성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흔히 잘 알려진 대로 많은 연구자들이 정사(正史)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여유가 많지 않았으므로 정사의 부족함을 보충하고 일관된 사관을 제시하는 ≪자치통감≫에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런 유혹에 현혹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자치통감≫을 만난 덕택에 업적주의에서 벗어나 기초 작업을 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몇 편의 논문을 더 쓰는 것보다 기초가 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장래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 기초 작업이라는 것이 바로 독자들과 역사학이 자주 만나는‘역사학의 대중화’였고, 역사학의 대중화를 위한 첫걸음이 바로 위대한 인류의 유산인 ≪자치통감≫을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치통감≫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분량은 무려 294권이나 되는 방대한 통사였다. 이를 번역하는 작업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번역은 한 글자라도 빼 놓을 수 없는 작업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논문작업은 어떻게 보면 알 수 없는 부분은 남겨 놓아 다음으로 미룰 수도 있지만 완역작업은 중간에 걸리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쉽게 손을 댈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역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선뜻 작업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는 1997년 3월이라는 시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계기를 갖게 되었다. 1987년 무렵,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 큰 회오리바람이 불었는데, 다행히도 잘 수습되어 새 재단이 학교를 맡으면서 나는 뜻하지 않게 학교보직을 맡게 되었다. 연구관계의 일을 비롯하여 도서관장을 지냈고, 이어 마지막으로 기획실의 책임을 맡기도 했었다.
이렇게 10년 세월의 학교보직에서 놓였던 난 지난 10년간의 외도(?)에서 들인 공에 비해 얻은 소득이 너무 없다는 자괴감에서 심기일전할 자세가 필요했다. 이젠 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는 각오로 그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기만 하던 필생의 염원을 그러나 막연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치통감≫ 완역작업이었다.
이 일이야말로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를 위하여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자치통감≫ 하면 그 책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래도 신념을 가지고 혼자서 이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때 생각으로 10년 정도면 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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