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17]

尹南漢:
홀로 꾼 거대한 꿈 ; 한국문집의 정리//
윤남한 선생님은 중앙대학교의 사학과를 창설한 분이다. 1958년에 중앙대학교에 사학과가 설립되고 처음으로 부임한 분이 윤남한 선생님이었으니 그분을 창설자라고 해도 잘 못은 없을 터이다.
당시 대학에서는 사학과를 설치하면서 입에 발린 말로 ‘정치(精緻)한 역사학을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말은 그저 말뿐이었다. 학교 당국이야 학생 정원을 늘려서 등록금을 수입으로 학교를 운영하였으니 심하게 말하면 학생정원수는 버스기사가 승객 숫자를 헤아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하니 사학과를 설치하였다고 하여도 역사학을 강의할 만한 설비나 도서가 준비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것도 겨우 3년간의 6.25전쟁을 휴전으로 끝낸 지 겨우 5년이 지난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전쟁 전에 그나마 눈에 띠던 자료도 많이 소실되었고, 학생들은 입학하였다고 해도 제대로 된 자료를 가지고 공부하기란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제 학과를 제 궤도 위에 올리느냐 못 올리느냐의 문제는 하는 수 없이 교수와 학생에게 달려 있었다. 당시에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군대 구호가 유행했지만 대학도 마찬가지였고 중앙대학교 사학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는 각기 달랐다.
이러할 때에 윤남한 교수의 생각은 다른 사람보다 좀 컸다. 지금은 이렇게 황폐한 환경이지만 장차 우리나라의 인문학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 기초를 다져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라도 당장 한두 편 논문을 쓰기에 바빴던 시절에 그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도서문헌을 정리하여 이를 연구자에게 공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문헌을 다 정리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국가가 나서야 할 일이지만 그러한 안목을 가진 당국자도 없었고, 그만한 돈을 지원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으니, 선각자로서의 각고는 말할 수 없었을 터이다. 그는 우선 당시에 출간된 각 도서관의 장서목록 등을 기초로 하여 당시까지 남아 있는 고문헌도서의 종류를 조사하여 대체로 1만2천 종으로 어림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선인들의 문집(文集)이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8천종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 문집의 목록을 수집하여 색인화한다면 인문학의 발전을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을 앞당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그의 구상을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는 오직 필요한 부분은 개인이 부담한다는 각오가 아니면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는 시작했다. 사람도 없고 돈도 없으니 그는 사학과에 들어 온 학생들을 동원하여 이 작업에 투여함으로서 작업도 되고 이를 통한 실제적인 공부도 되게 하려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 시절에 중앙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한 사람치고 문집목록을 카드에 옮겨 적는 데 동원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문(漢文)으로 된 문집목록을 카드에 옮겨 적다보면 그 자체가 한문공부가 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산학협동이랄까? 수입은 없었지만.
그 과정도 순탄할 리 없었다. 8천종의 문집 목록을 수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대학에서는 자기 대학도서관에 소장된 문집을 내 놓지 않는 곳도 있었다. ‘내 것을 왜 내 놓느냐?’는 소아병적인 생각 때문일 거라고 생각된다.
또 설사 도서관 출입을 허락한다고 하여도 많은 학생을 한꺼번에 투입할 수 없으니, 작업 자체도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방법이 문집의 목록을 사진으로 찍어다가 수집하면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또한 거기에 소요되는 필름 값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힘들기는 하지만 값이 싼 포지티브필름을 롤로 사다가 집에 암실을 차려놓고 필름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카메라에 들어가도록 작업했다.
그렇게 하고도 포지티브필름의 감광도가 낮으니, 찍으면서 셔터의 노출 시간을 1~2초 주어야 했다. 250분의 1초에도 감광되는 필름에 비한다면 정말로 찍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도 이 작업을 병행하면서 작업은 어느 정도 속도가 났다. 1960년부터 시작해서 15년쯤 지난 뒤에는 그 작업카드가 10만매에 이르게 되었다.
카드의 수집이 전체의 목표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수집한 것이라도 책으로 편찬해 내야했다. 어떻게 편찬할 것이냐의 방법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비용의 문제였다. 이것은 학생들 가지고는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개인이 은행에서 기채를 하여 그 비용을 감당하면서 시작했다.
이러한 사정을 알았는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연구비를 조금 주었다. 물론 10만매를 전부 정리하는 프로젝트는 아니고 우선 문집 가운데 있는 잡저, 기, 설, 논, 변 등 학술적으로 많이 이용될 수 있는 부분만 떼어서 편집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구상에 의거하면 전체의 10분의1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지와는 달리 쉽지 않은 작업이었고, 그 지원금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분의 생전에는 보고서를 낼 수 없었다. 후에 이 사정을 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지원을 받아서 이 책을 완성했을 때에 국배판 2400쪽이었다. 이 한권의 책이 나온 것만으로도 국학연구자들이 문헌을 찾는 작업은 반감했으니, 그분의 구상과 노력은 한국국학발전의 초석을 다지려는 작업을 벌인 것이었다.
나머지 9책도 계속해서 편찬 출간해야 하지만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조차도 한권을 내 보고는 힘들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우리나라 국학의 총본산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도 그러하였으니 실로 한국에서 인문학 기초를 쌓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사상누각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한국학의 초석을 쌓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은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카드는 지금 어느 대학 도서관의 한 귀퉁이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30년 동안 동면중에 있다.
해방 후 한국학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구호는 많았고, 지금에 와서 몇 천억의 연구비를 정부가 마련하고 있지만 아직도 윤남한 교수의 위대한 인문학의 초석을 다지는 꿈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고, 그러한 작업을 할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아직도 해방 후에 우리 학계에 불었던 논문 한편 쓰는 것이 거대한 작업에 참여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개인이기주의가 가셔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기에 폐허 위에서 한국인문학의 초석을 다지고자 했던 위대한 꿈은 꿈으로 잠자고 있다.
얼마 전 소설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상을 받았다고 하여 온통 축하일색이었다. 그런데 그의 소설을 번역한 벽안의 영국인 데보라 스미스가 한 말이 생각난다. ‘한국 사람은 책은 안 읽고 노벨상 받기를 원한다.’ 한국학, 한국학하면서, 인문학, 인문학 하면서 윤남한 선생님 같은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권중달(權重達)
전통문회 21호/2016. 8
[2016/07/17]

중국불교의 세계화 발표
한국교수불자연합회 연차 학술발표회에서
중국불교의 세계화-약서선원을 중심으로를 발표하였습니다.
7월 5일/ 부산
[2016/03/12]

중국문화원 강의
강의 주제 ; 자치통감을 통한 중국문화의 이해
강의 일시 ; 4월 5일 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9시

총 10강

* 재한중국문화원 홍페이지 참조
[2016/03/12]

강연
주제 ; 자치통감과 삼국사기
일시 ; 2016년 3월 18일
주최; 서울문화사학회
[2016/03/12]

강연
제목 ; 자치통감을 통한 중국문화의 이해
일시 ; 2016년 3월 12일
장소 ; 동국대학 사회과학과  M 103
주최 이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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