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7]

속자치통감출간
약속드린 바와 같이 속자치통감을 역주하여 5권을 한 책으로 묶어서 이미 1, 2 책 원문 1~10권까지는 출간하였습니다. 주석을 좀더 자세하게 달고, 지도를 넣어서 이해를 편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후속으로 3, 4 즉 자치통감 원문으로 권 11부터 20권까지 열권을 두책에 나누어 곧 출간할 예정입니다.
물론 원문도 부록으로 붙여 둔 것은 같습니다.
[2018/01/08]

400여년에 걸친 동아시아 역사의 결정체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역주의 의미

1. 한족사(漢族史)가 아닌 동아시아의 역사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은 청대 필원(畢沅, 1730~1797)이 송(宋)이 개국한 960년부터 명(明)이 건국하는 해인 1368년까지 409년간의 역사를 220권 235만자(萬字)로 편찬된 편년체 역사서이다.
이 400여 년 동안 동아시아에서는 많은 왕조가 병존하거나 부침(浮沈)하였다. 먼저 중원지역에서는 북송이 당말 오대를 거치면서 존재하였던 10국(國)을 멸망시키고 일정한 정도로 통일왕조를 세운다. 그러나 북송보다 먼저 오대시절부터 있었던 거란족의 요(遼) 왕조 그리고 서부지역에서 독립한 서하(西夏)가 서로 남・북・서라는 삼각관계로 병존하며 대립하였다. 동아시아 지역인 한반도에서도 당말 오대라는 분열 상황에서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변동이 있었고, 월남에서도 정조(丁朝)・전여조(前黎朝)・이조(李朝)・진조(陳朝)・호조(胡朝)가 바뀌는 변동이 있어서 동아시아는 전체적으로 역동적인 변동의 시기였다.
그 후로 거란족 왕조인 요(遼)의 쇠퇴와 더불어 여진족(女眞族)의 금(金)이 동아시아 극동에서 출발하여 요와 북송을 무너트리고 장강 지역까지 진출하여 그 세력 범위를 넓혀갔다. 그리하여 장강유역에서 금에 멸망한 송 왕조를 재건한 남송(南宋)의 황제는 금(金)왕조에 의하여 책봉되고 스스로 질황(侄皇)을 자처하였던 시기였다. 다시 내몽골지역에서 출발한 몽골족은 동아시아 전역을 그 세력범위에 넣고 중동과 러시아, 동유럽까지 그 세력을 넓혔던 몽골제국을 이룩하였다. 그 몽골세력의 일부는 전통적인 중원지역을 점령하고 원(元)왕조를 건설하였고, 그것은 1368년 명왕조의 건설까지 이어진다.
비록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라는 전통적 기전체 역사가 쓰였고, 그것이 《25사(史)》 속에 넣어서 마치 이 역사가 모두 중국의 전통왕조인 것처럼 오해되도록 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기간에 동아시아를 지배한 세력은 한족(漢族)이기보다는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 북방 족이었다. 이렇게 북방민족들이 압도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이 기간의 역사를 이끌었던 기록이 바로 이 《속자치통감》인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속자치통감》은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의 동아시아 역사를 한족(漢族)적 시각이 아닌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서술한 책이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역사가 한족(漢族)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허상(虛像)을 한 번에 깨 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역사는 곧 중국사라는 잘못된 역사 인식이나 역사관을 수정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책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2. 객관적 역사기록의 백미
과거의 역사를 기록하는 목표는 시대에 따라서 변하여 왔다. 고대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역사사실을 통하여 교훈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감계사관(鑑戒史觀)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역사는 철학의 논리를 증명하는 자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저작의도가 분명한 것은 자칫 저작자의 의도에 따라서 독자가 이끌리어 가기 때문에 저자와 독자 간에 주종(主從)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책의 저자는 교주(敎主)가 되기도 하는데 가장 심한 것을 꼽는다면 공자의 《춘추》나 주희의 《자치통감강목》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상이 전 사회를 지배하는 동안에는 학문의 주류는 훈고학(訓詁學), 심성학(心性學)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7세기 명말(明末)에 오면서부터 경전(經典)을 진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의 허점(虛點)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설사 경전이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공자(孔子)가 말한 내용이 200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대로 전달되는지에 대한 초보적 의문이 생긴 것이다. 전해 오는 동안 오자(誤字), 탈자(脫字), 연자(衍字)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공자가 원래 말하였던 의도와 달리 내용이 잘 못 전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이 잘못 전해진 것을 옳은 것으로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고증학(考證學)이 탄생하였고, 고증학은 사실에 근거하여 과장(誇張)하지도 축소(縮小)하지도 않는 그대로의 진실을 찾아가는 학풍인 것이다. 특히 고염무(顧炎武)에서 시작한 이 학풍은 절동(浙東)지역에서는 역사를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보고자 하는 학풍이 크게 일어나서 절동학파로 불리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인 필원(畢沅)이 중심이 되어 《문사통의(文史通義)》의 저자인 장학성(章學誠, 1738~1801), 풍집오(馮集梧), 소진함(邵晋涵, 1743~1796), 전대흔(錢大昕, 1728~1804) 등 당시 고증학의 최고봉에 있는 사람들이 교정하고 참여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물론 《속자치통감》이 나오기 전에 왕종목(王宗沐, 1524~1592)의 《송원자치통감》,  설응기(薛應旂, 1500~1574)의 《송원자치통감(宋元資治通鑑)》과 서건학(徐乾學, 1631~1694)의  《통감후편》 같은 책이 있었지만 이 책들이 지나치게 한족(漢族) 중심으로 쓰였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요・금・원사를 철저하게 추가하여 새로이 편집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편집하면서 참고한 서적은 이도(李燾)의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을 비롯하여 모두 110여종의 참고서를 가지고 확실하게 고증하였다. 즉 기존에 있었던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 서술을 비판한 것이다. 더욱이 이 시기에 학자들에게 사고전서(四庫全書)가 공개되어 학자들은 마음껏 사실을 찾아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므로 학문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역사는 ‘사실 그대로’를 쓰면 그 속에서 진리는 그대로 나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진리란 성인의 한 마디에 의할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알기만 하면 그 속에서 진리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특히 장학성은 역사가가 자기의 생각으로 역사책을 쓴다면 ‘그것은 뱀의 배에 다리를 그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사실에 근거하여 곧바로 쓰면 선악은 스스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서양근대 역사학의 대부(代父)라 할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 1886)가 ‘사실로 말하게 하라.’라고 한 것과 완전히 같은 내용이다. 오늘날 우리 사학계에서는 19세기의 독일 사학자 랑케의 이 말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꼽으면서 그보다 100년 앞선 장학성의 ‘사실이 바로 선악을 드러낸다.’라는 말을 간과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책에서 장학성의 청대 고증학자들의 철저한 객관적 역사 서술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근대역사학 정신이 철두철미한 고증학자들 특히 장학성이 참여하여 《속자치통감》을 편찬하였다는 것은 한족중심의 역사학을 탈피하여 과장하지도 않고 축소하지도 않는 커다란 시각(視角)의 동아시아역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객관적 역사학의 백미이다. 이보다 더 이상 객관적인 역사를 찾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책이 쓰인 청조시대는 만주족이 지배하였던 시기인 만큼 역사를 구태여 한족(漢族) 중심으로 써야할 이유가 없었다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압력 특히 한족(漢族) 중심적 역사관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몇 번 안 되는 시대였다는 것도 이 역사책의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한족이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절에 쓰인 역사책과는 확연하게 다르게 객관적 역사로 믿을 만한 이 책을 탄생시킨 것이다.

3. 동북공정에 대응할 최적의 서적
우리는 최근 10여 년간 역사 문제에서 중국에서 추진하는 이른 바 동북공정을 통하여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분개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사가 우리 역사라고 열을 올리며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적 정치적 대응 이외에 사실상 그에 대한 대응논리는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중국에서는 고구려 왕조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고구려가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개발하지만 빈약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를 형성하는데 대다수를 점하였던 종족의 후예라 할 거란족이나 여진족을 우리는 꾸준히 배척하면서 우리와 상관없는 종족으로 치부하여 왔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영역에서도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지역을 우리 역사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기간이 이미 1300여년이 흘렀고, 그에 대한 연구도 아주 일천한 상황에서 중국의 논리에 반박하는데 한계가 있다.
현재 중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하면서 그 이외의 종족을 다 수용하는 태도를 가지고 고구려 후예라 할 거란족이나, 여진족, 만주족을 자기들 중국민족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고구려 후예의 대다수인 거란, 여진족을 배척하면서 고구려사를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데는 스스로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것은 정치 논리이지 역사학 논리가 아닌 것을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논리를 격파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속자치통감》을 통하여 10세기부터 400여 년간의 동아시아 역사는 한족(漢族)이 중심이 아니라 북방민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시대였음이 웅변으로 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아시아 역사에서 한족(漢族)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논리는 명대(明代)를 거쳐 만주족 왕조인 청 왕조가 동아시아를 지배하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중국민족의 대표라고 할 한족(漢族)의 활동은 그다지 크지 않았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속자치통감》이라는 누구라도 인정하는 명저(名著)를 가지고 역사의 진실을 살펴본다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북방 족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는 것이고, 아시아는 한족(漢族)의 역사가 아니라 아시아 모두의 역사라는 사실이 증명되기 때문에 한족 중심이론에 바탕을 두고 진행하는 동북공정의 논리를 적절하게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우리나라에 이 《속자치통감》의 역주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하겠다.

4. 편년체 사서의 단점을 보완한 역주
역사책을 쓰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기전체(紀傳體)와 편년체(編年體)이다.
기전체란 인물 중심의 역사서이다. 보통 《25사(史)》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기전체로 되어 있다. 기전체란 제기(帝紀) 즉 황제의 기록과 열전(列傳), 즉 유명한 인물(人物)의 전기이기 때문에 인물중심의 역사서인 것이다. 따라서 황제들의 일대기와 유명한 인물들의 일대기를 모아 묶은 것이 기전체라 할 수 있다.
이 방법에는 한 가지 일을 진행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참여하게 되는 데, 그 인물들의 전기를 쓸 적마다 그 사건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같은 내용이 중복하게 되고 분량은 많아진다. 그러기 때문에 한 사건 혹은 한 시기에 일어난 일을 알기 위하여서는 아주 여러 사람의 전기를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러한 기전체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탄생한 것이 편년체 역사서이다. 이것은 시간을 중심으로 사건을 배열하기 때문에 사건이 중복될 필요가 없고, 어떤 사건에 참여한 인물과 그 역할을 종합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하는데 아주 편리하다.
그러기 때문에 북송 시기에 사마광에 의하여 편년체 역사서 《자치통감》이 탄생하였고, 그만큼 역사학 서술방법이 발전한 것이었고, 그 때문에 후속하여 많은 편년체 역사서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읽는 사람에게 불편함이 따르는데, 처음도 끝도 없는 것이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건이나 인물의 시작과 끝을 손쉽게 이해하려면 역사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불편함을 갖고 있다.
그래서 편년체 역사서의 편자(編者)들은 별도로 목록을 만들었다. 그 목록은 대체로 이 부분은 ‘어느 시기부터 어느 시기까지이다.’라는 것을 밝혀 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특정 사건을 이해하는데 불편하므로 다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가 나타나서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이 나타났다. 그러한 점에서 기사본말체는 편년체의 문제를 해결한 것 같지만 여기에도 다시 기전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다시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편년체와 기사본말체를 적절하게 종합하여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 《속자치통감》 역주는 편년체로 된 기록을 기본으로 하되 기사본말체에서 사건중심의 기록이라는 요소를 가져다가 사건의 내용을 제목으로 끌어내어 편년체를 보완하였다. 이 점에서는 이미 완간 된 《자치통감》 역주에서 보여 준 바이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과 그 시간 속에 펼쳐진 사건의 순서를 이해하기 쉽게 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속자치통감》의 역주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체계의 창안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관심 있는 시대와 알고 싶은 사건을 목록을 통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고 원서(原書)를 뛰어넘는 번역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2018/01/08]

중국의 속 살 : 연변의 문명(文明)과 거란족의 천년 꿈


연변 방문은 이번에 백두산 등정의 기회가 있었기에 이루어졌지만 나로서는 20여년 만이다. 마지막으로 연변을 방문한 것은 1996년에 북경의 인민대학, 요령성의 요령대학 그리고 길림성의 연변대학과 자매결연을 위하여 학교대표 일행과 함께 했을 때의 일이었다.
20여 년 전 당시에 연길공항에 도착하였을 때에 공항청사는 청사(廳舍)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초라하여 마치 어느 시골 기차역 같았다. 수하물은 활주로에서 트럭으로 실어다가 청사 광장에서 마구 던져버리며 찾아 가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긴 1989년에 처음 북경을 방문했을 때의 상황에 비하면 그것도 양반이었다. 중국당국이 1989년에 6·4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직후 세계학자들을 초청하여 중국도 야만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공자탄생 254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나도 초청을 받아서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960만 ㎢라는 거대한 중국의 관문(關門)인 북경공항에서 입국수속을 해야 했다. 그런데 입국심사대라는 곳이 판자로 이리저리 막고 겨우 구멍하나를 내 놓고 있었다.
그때는 서울에서 중국입국비자도 받을 수가 없는 시절이어서 홍콩에서 입국비자를 받아야 했기에 홍콩에 가서 하루를 자고 홍콩의 카아탁 국제공항을 떠나 북경으로 갔었다. 당시 내가 홍콩에서 출발한 곳은 카이탁공항인데, 이 공항은 조종사들에게는 어프로치가 어려워서 익스트림하기로 이름 나 있었고, 그래서 1998년에 새로 만든 첵랍콕 국제공항으로 대체되었으니 그리 썩 시설이 잘 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은 내가 도착했던 북경공항에 비교한다면 천당과 지옥 같았다. 이것을 보면서 이것이 중국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또 당시에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학자들을 위하여 주최 측에서 곡부(曲阜)으로 가는 야간 침대열차를 제공하였는데, 그때에 북경역을 들어가면서 열차표를 사기 위하여 기다리느라고 마치 난민처럼 역사(驛舍) 여기저기에 자리를 펼치고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았고, 이렇게 1주일정도는 보내야 표 한 장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참으로 한심하기까지 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 과정을 거쳐서 다음날 새벽에 곡부역(曲阜驛)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초등학교 학생 300명 정도를 동원하여 우리를 위하여 오성기(五星旗)를 흔들며 ‘열렬환영’을 외치던 안쓰러움은 당시 잔영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또 곡부에서 공자 탄생지를 방문하고자 호텔에서 택시를 구해달라고 부탁하였을 때에 허락을 하지 않았다. 강력하게 요구하자 그들도 못 가게 할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가라고 하면서도 절대로 택시에서 내려서 주민들과 접촉하지 말아 달라는 주의를 주었던 기억도 새롭다.
그 후 1989년 6·4사태가 일어났던 당시에 반체제 인사로 몰리면서 미국대사관으로 몸을 피하여 384일 10시간 동안 숨어 있어야 했던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인 팡리즈(方勵之)의 책 ‘우리는 지금 역사를 쓰고 있다.’와 ‘팡리즈자서전’을 번역하면서 중국의 전체주의적 사고(思考)로는 발전할 수 없다는 지성인의 절규를 보았다. 그리고 내가 당시에 경험하였던 짧은 잔상(殘像)이 팡리즈의 주장과 오버 랩 되어 진정으로 중국을 사랑하는 중국전공자로서 연민(憐愍)이 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한 시절에서 7년이 지난 시점에서 연길공항에서 수하물을 광장에 던져 버리는 것은 그래도 많이 발전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다시 20여년이 지난 지금의 연길공항은 완전히 국제규모였다. 어느 선진화된 국가의 공항 못지않게 모든 환경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격세지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중국이 많이 발전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였다. 내가 경험한 중국의 외형적인 변화는 1989년과 1996년 그리고 2017년이라는 시간의 격차 속에서 이미 공항시설과 거리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 그대로였다.
어디를 가도 풍요로움이 넘쳐흘렀으니, 들리는 말로는 지금 중국이 쌓아 놓은 곡식은 13억 인구가 4년 먹을 만큼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중국관광객이 안 들어오면 관광산업이 타격을 입는다고 말할 정도로 관광객은 외국에 나와서 돈을 쓴다. 그리고 미국을 가도 캐나다를 가도, 호주를 가도 중국인들이 집 사고 땅을 사기 때문에 부동산이 요동치고 있다. 중국은 이미 G2라고 한다.
이러한 시점에 다시 연변을 방문하고 중국의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닌 속살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속살은 재미있는 문구가 거리에 넘쳐 나는 것에서 보았다. 문명(文明)이라는 단어였다. 어디에든지 문명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하다못해 운전기사를 지칭하는 사기(司機) 또는 가사(駕駛)의 앞에도 문명이라는 수식어를 붙어 있어서 택시지붕 위에 부착한 전광광고판에 문명가사(文明駕駛)라는 문구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화장실 앞에도 문명이란 말이 접두어처럼 붙어 있다, ‘문명세수간(文明洗手間)’이라고.
무슨 말일까? 문명의 반대되는 어귀(語句)가 야만(野蠻)이니, 다른 기사나 다른 화장실은 야만인들이 운전을 하거나 야만인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이란 말인가? 그렇게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규정해 사용한 어귀는 아닐 것이다.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계몽적인 글귀일 것이다. 서구문명사회의 운전기사처럼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난폭운전 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교양을 갖춘 운전기사가 되자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화장실을 문명인처럼 깨끗이 사용하자는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직도 문명되지 못한 운전기사는 문명적인 운전기사가 되라는 사회적 교육구호였다. 그리고 이 구호는 중국사회가 문명화되기를 바라는 지도자, 통치자의 애끓는 마음이 투영되어 이러한 계몽적인 구호가 모든 단위(單位)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빨리 도달하고 싶다는 속내와 서구문명사회의 수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 한 현상을 자인(自認)한 셈이다. 물질문명은 상전벽해가 되었는데, 정신문화, 사회교양의 수준은 아직도 계몽해야 하는 수준에 있다고 보는 애타는 지도자의 마음이 거리 곳곳에서 서려 있음을 보았다.
사실 중국의 문화운동은 192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1850년대 아편전쟁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은 중국은 왕조체제를 무너트리고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덕선생(德先生, democracy)과 새선생(賽先生, science)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사회운동으로 벌였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새선생(賽先生)이 가르친 교육은 인공위성을 날게 하였다. 하지만 덕선생(德先生, democracy)의 가르침은 크게 효험을 못 보고 있는 셈이다. 서양의 문화, 문명을 만들어낸 두 기둥 가운데 하나만 받아들인 반쪽 서구화였다.
사실 사회적 질서는 민주적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민주적 훈련을 통하여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이 탄생하고 이를 통하여 현재 서구사회는 이루어졌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자율성을 최대 가치로 여기는 민주훈련을 마다하고 계몽(啓蒙)으로 달성하려고 하는 현장이 연변에서 본 것이다. 우리도 그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 충청북도에 통금을 해제하게 되자 그곳을 너무 부러워하였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통치자가 통 크게 충청북도에 통행금지를 해제했기 때문이었다.
통치자는 자율에 맡기면 질서가 무너질까 걱정한다. 그래서 잘 가르쳐서 질서를 지키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가르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고 이것이 통치자의 전형적인 사고이다. 통치자는 인민과 사회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에서 열심히 가르쳐서 질서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택시위에 문명이라는 글자를 계속 돌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과거에 벽마다 ‘방공·방첩’이란 구호를 써 놓았던 우리처럼.
그러니까 중국에는 아직도 자율적으로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는 아닌가 보다. 통제된 사회, 계획화된 사회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1989년도 팡리즈의 경험이 생각난다. 팡리즈는 민주화와 자유화를 부르짖은 과기대 부총장이었다. 자율화된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대학의 자율화를 주장하였지만 그것 때문에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혔다. 그래서 과기대 부총장에서 하루아침에 천문대 연구원이 되었는데 마침 그 때에 미국 부시대통령이 중국에 왔고, 대사관 파티에 그를 초청했다.
중국정부는 그것을 알고 처음부터 막지 않아서 중국이 자율국가인 것을 가장하려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팡리즈가 미국대통령이 초청하는 만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방해하는 과정은 몇 단계였다. 팡리즈가 탄 차를 미행하다가 일정한 지역에 와서 자동차의 통행을 금지 시키는 것, 그래도 내려서 버스를 타려고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팡리즈가 탈 정거장을 폐쇄하는 것 등 몇 단계였다.
그런데 팡리즈는 결국 파티에 참석은 못했지만 도중에 아는 대사관 직원을 만나서 그의 집으로 가서 전화로 연락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팡리즈에게 미국대통령 초청만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작전을 세운 공안(公安)에서는 계획당시에 의외의 변수인 팡리즈가 우연하게 대사관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였고, 이 작전에 참여한 공안들은 그러한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계획은 완전무결하게 실천되었으나 일선에서는 변수에 적응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던 사례이다. 자율성 없는 사회의 한 모습이다.
그러니까 완전무결한 계획에 의하여 통치하고 있어서 현재에 4년 먹을 양식이 쌓여있고, 인공위성이 날고, 돈을 가져다 외국에 땅을 사고 아프리카에 돈을 퍼다 준다고 한들 그 힘이 통치자의 힘이고 그의 공로라고 한다면 아직도 변수에 대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수준의 국가일 수밖에 없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고 수많은 변수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실행하는 사람의 창의력과 응기응변의 조치가 필수적이다. 아직도 덕선생의 가르침 대신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통치자가 원하는 대로 아직도 ‘문명가사(文明駕駛)’를 계몽하게 된 것은 아닐까?
연변에서 돌아오는 기내(機內)에서 남방항공의 기내용 잡지를 펼쳐 들었다가 눈에 띠는 제목을 보았다. “와룡호(臥龍湖), 재속거란천년몽(再續契丹千年夢)”이라는 제목이었다. 해석해 보자면, “와룡호에서 거란종족이 1천년 동안 가지고 있는 꿈을 다시 계속한다.”는 정도가 아닐까? 와룡호 혹은 사간호(査干湖)로 불리는 길림성의 맨 북쪽, 거의 러시아에 가까운 지역에서 거란족들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탐방하여 쓴 글이었다.
96개의 그물을 이어서 50여명이 합동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전통적인 거란족의 어렵(漁獵) 방식이었다. 이 방식이 지금부터 1천 년 전에 사용되었던 방법이고, 지금도 이 방법으로 고기를 잡는다니 탐방자는 마지막으로 ‘1천년 동안 내려온 거란 풍속문화의 역사적 재현이라’고 쓰고 있다. 다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듯하였다. 이글을 읽으면서 이것이 자율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과거의 습속을 보존시켜서 관광자원 혹은 어떤 목적으로 활용하려는 계획화된 모습인가? 하는 의문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
중국사회를 계획화된 사회라고 한다면 이 1000년을 내려오는 고기잡이도 계획적으로 보존해야하는 것이어야 맞다. 그렇다면 이 계획에 동원된 이 사람들은 동물원의 동물처럼 구경거리로 만든 것이다. 마치 소설 ‘Brave New World’에서 계획에 의하여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숫자를 정하여 공장에서 필요한 숫자만큼 사람을 생산해 내는 미래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출산하는 사람은 동물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인가?
반대로 만약에 정말로 자율이 허용되고 그래서 자율적 질서가 유지되어 거란족의 집단고기잡이 방법은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고 그들의 철학이 숨어 있는 것이라면, 중국 사회가 다양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아주 좋은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자율이 주어졌는데 왜 연길에서는 문명이 강조될까? 우연치 않게 연변을 방문하여 우연치 않게 본 중국의 속살을 보면서 이것이 중국의 현재 민낯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권중달, 2018, 1, 3
[2018/01/08]

원단(元旦) 백두산등반 유감(有感)

2017년을 마무리하고 2018년을 백두산에서 맞자는 연변과기대 양대언(梁大彦)교수님의 제의가 있었던 것은 2017년 마지막 ‘아노아’모임에서였다. 양교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2018년 원단에 백두산등정을 하게 되면 새해 첫날 등정한 것이 20년 동안 한 번도 안 빠지는 것이고, 백두산 등반 전체를 말하면 109번이라고 하였다.
백두산의 무엇이 이토록 양대언이라는 분을 매료시켰을까? 남북통일의 염원일까? 아마도 백두산의 북파(北坡, 백두산을 등정하는 북쪽 언덕길)를 통하여 정상에 올라 천지(天池) 너머로 보이는 갈 수 없는 북한 영토 장군봉(將軍峰)을 바라만 보고라도 마음속으로 통일을 빌어 보려는 충정(衷情)이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그곳으로 안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 12월 30일 중국남방항공에 몸을 싣고 연길(延吉)에 도착하여 하루를 자고는 31일에 미리 예약해 둔 백두산 북파 바로 아래에 있는 ‘중국빙상선수단 숙소’를 향해서 떠나는 버스는 설렘으로 가득하였다.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장백폭포수의 물이 일정한 거리만큼 지상(地上)으로 흐르다가 땅속으로 사라져서 복류(伏流)하다가 용출(湧出)하여 곳이 이도백하(二道白河)라는데, 이곳을 지날 때쯤에는 눈발이 거세게 내렸다.
눈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울창한 수목(樹木)과 눈 내리는 겨울 경치는 이 기회가 아니면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카메라를 꺼내서 동영상 키를 눌렀다. 그 만큼 참을 수 없는 정경(情景)은 백두산을 등반하러 가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덤이었다.
이곳을 지나게 되자, 문득 일제 강점기에 일인(日人)들을 피하여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서 이 땅을 개척하였던 연변조선족들의 선조가 겪었을 고생이 상상의 내래 속에 펼치고 지나갔다. 어디 그뿐이랴! 거란족이 요(遼) 왕조를 건설하고 남쪽으로 북송을 압박하면서 동쪽으로 이곳까지 그 영역을 넓혔던 그 기상도 눈앞에 아른 거렸다. 그 때에 속자치통감에 실려 있는 이곳에 살던 당시의 여진족들이 신흥하는 요(遼)에 내부(內府)하겠다고 요에 공물을 바치며 은인자중(隱忍自重)하였던 여진족의 큰 꿈도 언뜻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에 대흥안령의 적봉을 중심으로 하였던 거란족이 쇠퇴하면서 대신 이곳에서 여진족이 발흥(勃興)하여 금(金)왕조를 세웠고, 드디어 서진(西進)하여 중원지방을 경략하고 남송황제를 조카 황제로 책봉(冊封)하였던 빛나는 역사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욱이 나의 선조이신 권행(權幸) 어른의 아들이 고려에 항복한 한(恨)을 가진 신라의 백성으로 고국을 뛰쳐나와 이곳에서 여진족을 지휘하였던 함보(函普)가 이 지역에서 망국(亡國) 신라를 생각하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였을 그 고뇌가 머리를 스쳐 갔다.
그 고뇌의 세월을 거쳐서 10대후손인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에 이르러서는 자기 조상이 신라시절에 사용하던 성(姓)을 국호로 정하여 금(金)나라를 세운 것을 생각하면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러하니 이곳은 대대로 우리 조상들이 웅지(雄志)를 키운 곳이었다. 그 웅지가 당장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10대(代)쯤 이면 나타난 셈인데, 이를 모르고 요(遼)・금(金)을 오랑캐로 배척하는 한국사 교육의 한심함이 마음을 쓰리게 하였다.
이성계의 선조도 이곳에서 몽골족의 이름을 쓰면서 자기 세력을 키워 나갔고, 그 결과 이성계에 이르러 압록강 두만강까지 영역을 넓히는 위대한 조선왕조를 건설하였는데, 이처럼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이름을 바꾸고 성을 바꾸어 가면서 대업을 이루었음에도 이를 두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비판하는 한국내의 소아병적 분위기가 가슴을 짓누른다.
힘도 없이 무조건 이곳이 고구려 옛 터전이니 우리 땅이라고 우겨대는 현실감 없는 교육, 그러면서 고구려 역사를 연구하는 진정한 학자는 손에 꼽을 만큼도 없으면서 중국만을 비난하는 한심한 국가 기관들, 언제나 김함보 같은 이성계 같은 통 큰 인물이 나올 것인가?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는 백두산 천지 앞에서 이러한 인물의 탄생을 빌어 보고 싶었던 것이 또다른 양대언 교수의 끈질긴 백두산 원단등정이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원단에 백두산 천지로의 등반은 기상 상태 때문에 10시나 되어서야 등정 길에 오를 수가 있었다. 20분 달려 오른 백두산 정상에서 내려다 봐야하는 천지는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몸을 가누기가 힘들게 부는 세찬 바람은 도리어 우리가 도착하여 조금 있다가 천지를 덮고 있는 구름을 물러가게 하여 6m 두께로 얼었다는 천지의 얼음판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천지 너머로 장군봉 위에 구름이 반쯤 허리를 두르고 있다.
이미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은 영하 30도의 날씨에서도 그 강렬한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을 가지고 갔던 그릇만큼 받았으리라! 원자력 전문가 이중재 교수님은 우리나라의 에너지 강국을 만들 큰 그릇을 가지고 가셨을 터이고, 경제 전문가인 이용환 교수님은 다시 경제부흥을 이룩할 큰 주머니를 가지고 가서 천지 위로 비치는 에너지를 담아 오셨을 것이다.
항상 원자탄이 터지고 있는 태양이라는 에너지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힘의 원동력이다. 아무리 몇몇 철없이 탈원전을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 해도 백두산 정상의 천지 위에서 두 손을 하늘로 뻗어 그 에너지를 받아들인 등반자 일행 11명에게는 원자탄의 폭발력만큼이나 강한 힘으로 가족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쏟아 낼 것이다. 권중달 2018.1.3
[2017/03/15]

헌재가 짊어질 역사적 평가

지난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헌재의 결정으로 파면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고 잘 했다는 사람과 잘 못했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글을 쓰는 것은 제가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이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를 해 왔습니다. 역사가는 사건을 사실대로 전하면서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서는 평가를 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다른 역사가도 아마 이 사건에 대하여 평론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어느 역사가가 이번 사건을 ‘시민명예혁명’이라고 명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시민들이 시위를 일으켰고, 커다란 불상사도 없었으며, 그 위에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으니, 결과적으로 시민들이 대통령을 끌어 내린 것이며 이는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글을 보면서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혁명’이라는 단어를 어떤 사건에 붙이려면 그 사건으로 인하여 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왕정이 민주정이 된다든지, 독재체제가 민주체제로 된다든지, 혹은 민주주의 제도가 공산주의 제도로 바뀐다든지, 하다 못해서 국가의 이념을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는 정도라도 있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는 혁명이란 체제변동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그러한 어떤 변화의 모습이 없었고, 또 그러한 제도의 변화를 주장하는 구호나 어떤 행동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른 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논하면서 헌법 개정을 하자는 말이 나오기는 했어도 이른 바 촛불시위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없었습니다. 오직 드러난 주장을 보면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의 하야와 구속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으로는 혁명적 조건이 안 됩니다.

그러면 이번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제 눈에는 이성적으로 사건을 보지 못하는 대중들이 있고, 이들을 이성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치인은 없었으며, 이 기회를 이용해서 이익을 보려고 하거나 어떻게 해야 향후 유리할까만을 계산하는 근시안적 정치인만 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는 오직 증오만 증폭되었고 찬반으로 확연하게 갈라진 사회를 보았는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으려는 꼼수만 피웠을 뿐 어디에도 갈라진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사실 화합을 위하여서는 먼저 용서가 따라야 합니다. ‘죄 없는 자가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경구는 누구에게나 적용됩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서로의 잘 못을 지적하면서 용서할 수 없다는 사회의 암담함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니 ‘시민명예혁명’이라고 평가하는 데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말대로 시민혁명이라고 합시다. 혁명의 주체가 시민이라는 말인데, 이제 앞으로 이 시민들이 어떻게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까? 이들이 참여할 길이 선거 외에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선거 방법 밖에 없다면 달라지는 것은 없고, 체제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기껏해야 정부의 교체이지요.
그러니 혁명은 아니지요. 그저 박근혜가 기분 나쁘니 이 낌에 끌어내리자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광장민주주의, 우중민주주의가 나타난 것이고 우리 민주주의 제도에서 후퇴한 것입니다. 광장민주주의가 가져 온 무질서 때문에 선거와 대의제도가 생긴 것인데, 다시 광장민주주의로 가고 있으니, 민주주의의 퇴보이지 영광스러울 일이 아닙니다.

이번 사건을 통하여 발가벗겨진 것은 박근혜의 사생활뿐이 아닙니다. 사건을 봉합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인들이 이를 해결하지 못한 무능함과 오직 법률적 시각만으로 심판하여야 할 헌재 재판관들의 정치적 판단을 하려고 눈치 보기를 한 것이 속속들이 까발려졌습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최고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의 무능력이 까발려진 것입니다. 그것도 형편없이 무능, 무식하다는 것을.

먼저 한국 정치인들을 봅시다. 이 사건은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최서원이라는 여인을 최순실이라고 부르면서 이 여인이 정치에 간여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언론에 보도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시작했는데, 그 저변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 딸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것 같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역대 대통령치고 이번 문제와 비슷한 것이 불거지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관행적으로 보자면 이번 사건도 다른 전 대통령시절에 있었던 것들과 비교할 때 그리 크거나 심한 것도 아니고, 그저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의 잘 못된 행태가 이번에도 나타났다고 타기하는 것으로 그칠 뿐이었을 터인데, 이렇게 심하게 부정적으로 나왔던 데는 개인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증오 같은 것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민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항의로 그러한 의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치사회의 문제입니다. 당연히 정치인들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나섰습니다. 그들이 나서서 시민들의 의사를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설득할 것은 설득해서 나라가 분열되지는 않게 하면서 나라 안팎에 산적한 일들을 추진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정치인들의 책무이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시민을 설득하여 정치적으로 해결하기는커녕 문제를 키웠습니다. 모든 국내외 문제를 다 집어 치우고 오직 이 한 가지 문제에 올인 했습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는데, 싸움을 부추겼고 또 편을 들어 싸움에 가담했습니다. 급기야 정치인들의 집합소인 국회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공을 헌재로 넘겼습니다. 탄핵소추 결의를 한 것이지요. 정치적인 사건을 법률적으로 심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정치적으로 해결하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 아니었습니다. 대통령과 국회의 문제인데 국회는 스스로의 역할을 포기하고 헌재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야가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치를 해야 할 사람들이 정치를 포기했으니, 이들에게 무슨 정치적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권력에 눈이 어두웠다는 것만을 만 천하에 공고한 셈입니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패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정치는 앞으로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렇게 시민들로부터 불신을 받는 정치인들이 설 곳은 어디입니까? 참으로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야당에 통 큰 정치인이 나와서 갈라진 시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할 방법으로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를 취소해 주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는 것이 되고, 헌재도 살려주는 것이 되며 이렇게 설득하러 나선 사람은 결국 통 큰 사람이 되어 선거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물론 박근혜는 퇴임 후에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니까 그 심판이 좀 늦어지는 것뿐 실제로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정치인들만 양산해 냈습니다.  

다음은 헌재의 심판관들을 봅시다. 그들도 이 사건이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도를 보면 어떤 심판관은 ‘정치적인 문제를 우리에게 왜 떠넘기느냐?’라고 했다지요. 맞는 말입니다. 헌재는 법률적 심판을 하는 기관입니다. 정치적 고려 없이 정치적 사건을 심판하려고 한다면 부담이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헌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 사건을 정치인들에게 돌려보내든지 아니면 철저한 법리에 따른 심판일 것입니다. 심판을 할 것이라면 비록 99%의 사람들이 싫어하는 판단을 할지라도 오직 법률적 시각으로만 심판을 해서 그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고 해도 이를 감수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어려운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사건을 정치인들에게 되 돌려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헌재는 판단을 하지 않아도 되고 짐도 더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 사건을 각하하면 됩니다. 기각이나 인용은 판단을 한 것이기 때문에 각하시켜서 판단을 하지 않고 정치권의 일이니 그쪽에서 해결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헌재는 판단하기가 어려운 정치적인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어리석은 결정이었습니다.

또 이 사건을 판단하기로 결심하였다면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명확한 법리를 제시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법리적인 판단보다 오히려 정치적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헌재가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점을 몇 가지만 들어 보겠습니다.
1> 대통령 변호인단이 증거를 제출하거나 증인을 신청할 때에 이를 ‘재판을 지연시키려는 꼼수’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꼼수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헌재는 증거를 보지 않겠다 하고 증인을 부르지 않겠다고 했으니 대통령 측에게는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할 빌미를 준 것입니다. 이를 꼼수라고 판단하는 것이 정치적 판단이라고 보여 집니다. 재판을 빨리 진행시키는 것이 사실을 제대로 심판하는 것에 우선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대통령 변호인 단은 절차적 하자를 끊임없이 제기했습니다. 첫째로 국회의 의결에서 절차적 하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국회의 의결에 하자가 없다고 한 법무부의 해석을 받아 들였습니다. 이는 헌재가 최고의 해석기관인데, 자기 스스로 해석하지 않고 법무부의 해석을 채용하였습니다. 법무부의 해석이 잘 못이라는 변호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지요. 오히려 법무부의 해석을 인용할 것이 아니라 헌재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고 국회의 절차를 해석했어야 했습니다. 법무부의 해석을 가지고 국회의결의 절차적 하자가 없다고 한 것은 스스로 절차적 해석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무능의 표현이지요.
3> 헌재는 국회의 소추장을 다시 쓰게 하여서 국회 쪽을 유리하게 지원한 셈이 되었습니다. 국회의 소추장이 말이 안 되었다면 그것으로 각하의 조건이 되는 것이지 억지로 다시 고쳐 쓰게 한 것을 보고 어떻게 공정한 심판자를 자처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변호인단에서는 억울하게 생각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판단은 정치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4> 판결문을 보면 최서원의 국정 개입이 오래 지속되었는데, 이 고리를 끊어야 다음 대통령도 이러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지였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정치적인 판단입니다. 구체적으로 최서원이 어떻게 언제 얼마나 개입한 일이 적시되지 않은 채 판단한 것은 판단의 적정성을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로 차후의 대통령이 이러한 일을 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 효과를 기대할 어떤 보장도 없는 이익을 내세웠습니다. 설혹 그 이익이 나타난다고 해도 오히려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을 파면시킴으로서 나타나는 당장 나타나는 헌정질서의 중단과 그에 따른 혼란, 나쁜 선례 등 여러 가지 부담하여야 하는 손해와 비교할 때 설득력이 적습니다.
5> 고영태 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조사는 사건의 실체를 아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이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변호인 단의 말대로 이번 사건이 고영태가 일으킨 사건이라면 대통령은 전체 일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잘 못이 있다고 하여도 오히려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는데, 왜 이를 무시하였는지 분명한 설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도 정치적 판단이라고 보입니다.
6> 헌재는 박대통령에게 괘씸죄를 적용했습니다.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를 조사하는 검찰에 협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당하기 때문에 미란다 원칙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아무리 잘못한 사람이라도 검찰에 협조 안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수사에 협조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7>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 일에 맞추려는 것은 전말이 전도된 발상입니다. 박헌철 재판소장의 후임을 대통령권한대행에게 임명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고, 또 이정미 재판관의 후임은 절차에 따라서 다시 지명하면 되는 것이지 교각살우하는 식으로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 전에 심판하려한 것이야 말로 법에 의한 절차의 진행은 아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헌재의 판결은 논리성이 아주 부족합니다. 심판에 승복하는 것은 논리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지 정치적 이유를 가지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헌재는 변호인단의 변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제척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였으니, 헌재의 논리적 수준을 만천하에 공개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가진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쯤해서 일화 하나가 생각납니다. 어떤 판사가 자기의 오판으로 어느 사람에게 사형언도를 내렸는데, 사형이 집행 된 다음에 자기의 오판을 발견하고는 법복을 벗어 놓고 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자기의 오판을 가지고 얼마나 자책을 하면서 일생을 살았겠습니까? 헌재 심판관들은 자기들의 심판을 두고 장차 어떤 평가가 나올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번 사건으로 득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파면되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인은 정치력이 없다는 것이 공개되었으며, 헌재는 스스로 심판 논리를 찾아 내지 못하고 정치의 눈치를 본 판결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한국이 입어야 할 손해는 결국 헌재에게 짐으로 남겨질 것입니다. 한국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정치인과 심판관들은 우리나라에서 엘리트들입니다. 엘리트인 이들이 이러하다면 다른 것은 어떨 것이냐고 질문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원인은 결국 교육에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다양한 사람을 한 잣대로 한 줄로 세워 왔습니다. 그래서 옆을 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철학, 역사, 문학을 접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는 시야가 좁습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국익보다는 사익에 앞서 생각합니다. 그러니 국제적 경쟁 속에서 한국은 경쟁력을 가질 수 없고 한국의 위상도 올라가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10년 정도를 내다보면서 행동해야 하는 진중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제대로 키워야 합니다.  권        중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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