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26]

나의 역사연구
나의 역사연구

                거시적 역사의 이해
                        권        중        달(중앙대 명예교수)
                        2019. 3. 23/ 대우학술재단빌딩 702호실

역사공부의 시작
나의 역사공부 시작은 중앙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尹南漢교수로부터 조선왕조실록을 필사하라는 숙제를 받은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당시에 윤남한교수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조선시대의 양명학’을 연구하고 있었을 때였다. 학교에 나가면 그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카드에 필사하는 일을 숙제로 내 주었다. 윤남한교수는 왕조실록을 보면서 연필로 베껴야할 부분을 표시해 놓고 나서 그 두꺼운 책을 내게 주면서 표시한 부분을 카드에 베끼게 하였다.
이 일은 내게는 꽤 힘든 일이었다. 우선 漢文으로 된 내용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고, 생소한 글자는 옥편을 찾아 가면서 써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이 숙제를 하면서 막연하게 ‘아마 역사 연구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얼마쯤 하였는데, 윤남한 교수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우리나의 先賢들의 文集 目錄을 베끼는 작업이었다. 윤남한 교수는 우리나라 古文獻은 대강 총 1만 2천종으로 잡고 그 가운데 문집이 8천종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 문집이 차지하는 量이 전체 문헌의 3분의 2가 된다고 이해하면서 이를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이 문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한국학을 연구하려면 연구자는 각기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이 문헌들을 찾아 돌아다녀야 하는데, 이러한 작업이 연구 작업 전체의 8~9할이 될 것이고, 이 노력을 하지 않고 한다면 그 연구 결과란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국가에서 이러한 문제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있으니 누군가 개인적으로라도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윤교수는 이 일을 自任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는 먼저 문집의 목록을 수집하여 이것을 가지고 索引作業을 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마침 국사편찬위원회에 한국인문집목록을 수집하여 정리해 둔 것이 얼마간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목록집은 韓紙에 붓으로 적어 놓은 것이다. 당시에는 복사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 목록을 수작업으로 카드에 옮겨야 했다.
당시에 윤남한교수는 그것을 옮겨 적을 카드를 인쇄하여 놓고 학생들에게 얼마씩 숙제를 내 주고 나는 그것을 관리하였다. 나는 한편으로는 문집목록을 카드에 옮겨 적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작업에 참여한 학생들을 관리한 것이다. 국편에서 빌려 온 원본 책을 잃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누가 어느 문집 목록을 가져갔고, 얼마나 작업을 해 왔는지를 메모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이때에 중앙대학교 사학과에 다니는 학생이면 이 작업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국편에 있는 목록은 많기는 했지만 문집의 전체 분량으로 보아 아주 일부분이었다. 국편 목록을 베끼는 작업을 끝내 놓고 각 대학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문집을 빌려서 목록을 베끼기 시작하였다. 가장 생각이 나는 것은 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가 있는 藏書閣에 소장된 문집을 빌려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또 특히 Y대학 도서관에서는 그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문집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하여 윤남한교수가 속상해 하는 일이 있었다.
또 생각나는 것은 나는 한동안 국립중앙도서관에 출근을 하다시피 하면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문집의 목록을 수집하는 일을 했다. 이때에 손으로 필사하는 것은 能率이 오르지 않자 카메라로 목록을 찍는 작업을 하였다. 카메라로 찍는 이 작업을 하면서 네거티브 필름을 낱개로 사면 비싸니까 10ft짜리 Role을 사고, DPE(developing, printing, enlarging) 店에서 필름 껍데기를 얻어다가 암실 주머니 속에서 손으로 더듬거리며 필름을 잘라서 채워 넣는 작업을 하였다.
그 필름 값도 많이 들자 이번에는 포지티브 필름을 사서 그것으로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카메라로 포지티브 필름을 넣어서 찍을 때에는 네거티브 필름으로 100분의 1초로 노출을 주어야 하는 것에 비하여 2~3초로 주어서 몇 백배 노출을 더 주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암실에서 DPE점에서 현상해 온 필름을 가지고 인화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하여간 이 작업은 7~8년은 지속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군복무 중에도 외출이나 휴가를 나오면 이 작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장기적이고 힘든 작업을 하도록 훈련된 셈이었다.  
이 작업을 통하여 나는 비교적 역사공부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산더미 같은 자료를 구경했으니, 당시에 논문이란 대개 한 두개 정도의 문헌을 이용하는 상황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면 윤남한교수가 많은 논문을 남기지 않았던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한국문집 잡저기설류기사색인의 편집
이 작업은 내가 유학을 떠나면서 거의 중단 상태가 되었다. 내가 대만에 유학 중에도 이 작업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마침 대만에서는 카드에서 쉽게 필요한 기사를 추출하는 방법으로 1247穿孔法이라는 것이 앞서가는 연구자들에게 유행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한국의 연구 수준이 대만을 쫓아가려면 한참 따라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이 방법은 카드에 실린 기사를 몇 개로 분류하여 그에 해당하는 구멍을 뚫어 놓고 쌓아 놓은 다음에 연구자가 필요한 항목의 번호를 쇠꼬챙이로 카드에서 찾아내는 방법이었다. 나는 이 방법을 설명하는 책자와 샘플을 구입하여 윤남한교수에게 보냈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이 1247찬공법에 관하여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보낸 설명서는 대만유학을 하였던 沈愚俊교수가 이를 번역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카드는 대량 인쇄하여 여기에다 작업을 다시 하였다. 내가 대만에서 4년간 공부를 마치고 중앙대학교에 전임강사로 부임하였을 때에 이 작업을 다시 활력을 찾아서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윤남한교수는 한국인들의 문집에 실린 紀事를 文體別로 인덱스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 가운데 역사연구자들에게 가장 활용도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雜著와 記, 說, 論, 辯.... 등 목록의 인덱스를 먼저 편집하기로 하였다. 이 작업을 하면서 장차 컴퓨터가 활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이를 숫자로 기호화하는 작업도 진행하였다. 아마도 1247찬공법은 컴퓨터가 실용화되면 쓸모없는 방법이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한 단계를 뛰어넘으려는 생각이었던 같다. 그래서 1247찬공법은 관심만 가졌지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
당시에 숭실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전산교육을 실시하게 있었는데, 이 교육을 받은 중앙대학교 직원을 이 작업에 참여시켰다. 이때의 전산수준이란 EDPS(electronic data processing system) 수준이었다. 또 당시에 하버드대학의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agner, 1924~2001) 교수가 조선시대 文科榜目을 가져다가 전산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분이 한국을 방문하자 찾아가서 이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기도 하였고, 이때에는 동국대학교의 宋俊浩교수가 미국에 가서 와그너와 같이 작업을 했기 때문에 많은 조언을 하였다.
이때에 동원된 器機로는 手動式 孔打와 미군부대에서 쓰다가 폐품이 되어 나온 제럭스(Zerox) 복사기였다. 제럭스 복사기는 마치 사진기 같았는데 토너를 이용하여 복사하는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도 손으로 필사하였던 勞力을 훨씬 줄일 수 있었다. 또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수동식 공타기가 있었지만 漢字의 숫자가 워낙 적어서 문집색인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만에서 수동식공타기를 사왔다.
마침 내가 대만에서 귀국하면서 이삿짐을 무관세로 들여 올 수가 있었기 때문에 대만에서 이 수동식공타를 하나 사다가 이 작업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인문집 목록의 색인편찬사업의 첫 번째 작업인 ‘한국문집 잡저·기·설류기사색인’ 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나는 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면 바로 학생들과 이 작업을 해야 했다. 보통 밤 11시까지 휴일도 없이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내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나는 일단 귀국하여 취직을 하고 있었지만 이때에 박사학위논문제출 자격시험에 합격한 상태였을 뿐 아직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는 우선 학위논문부터 준비하여야 했지만 문집작업 때문에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문집작업은 1년 정도 미루자고 하고 한국에서는 도저히 논문을 쓸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학교에 휴직을 하고 대만으로 갔다.
대만에 다시 가서 마침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그 박사학위 논문이 학교에서 통과하여 博士學位候選人이 되고 교육부의 심사를 앞둔 시점에서 그때까지 한 번도 못한 대만 일주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지금 국편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광교수가 내게 윤남한교수가 돌아가신 것을 전보로 알려 왔다. 나의 석사논문 지도교수인 윤남한 교수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때 나는 교육부심사를 한 달 앞에 두고 있었고 또 이미 장례를 모신 다음이어서 바로 귀국할 수는 없었다.

윤남한교수의 친구 분들
나는 대만에서 교육부의 학위논문심사에서 통과되자마자 바로 귀국하였다. 윤남한교수가 추진하던 한국문집의 목록색인작업은 중단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 작업을 위하여 윤교수는 한국문예진흥원으로부터 약간의 지원을 받았는데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한 상태였고, 한국문예진흥원도 연구비는 나갔는데, 보고서가 제출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니 좀 난감해 하였다.
나도 귀국을 했지만 이를 이어서 추진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윤남한 교수의 친구 세분이 나를 불러냈다. 이화대학의 함홍근교수와 소설가인 ‘현해탄을 알고 있다’의 韓雲史선생 그리고 은행지점장을 하였던 한 분(성함은 잊었음)이었다. 요지는 나에게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문집기사색인을 완성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 되지만 당시 사정으로 보아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물론 한국문집의 목록을 완전히 다 수집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6천종을 마쳤으며, 카드의 분량은 10만매였으니 그 분류나 내용을 다른 사람은 손을 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윤남한 교수도 이 때문에 빚을 지고 있었던 판에....
그러한 상황에서 마침 고병익교수가 지금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원장이 되었다. 또 윤병석교수도 그곳에 있었고, 박병호교수도 있었으며, 당시에 李成茂교수는 국민대학에서 그곳으로 옮긴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다. 이분들이 계신 덕에 윤남한교수의 문집편찬을 지원하기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쯤 결정되면 연구지원이 바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나보고 정신문화연구원에 와서 그 내용이 무엇이며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준비하여 가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가보니 역사학은 물론이고, 서지학, 한문학을 하는 전문가들을 20~30명 모아놓고 세미나를 연 것이다.
물론 발표자는 나 혼자였고, 이분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과정이었으며, 이 과정을 거친 다음에 이분들의 종합된 의견을 듣고 지원을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 많은 학자들은 윤남한교수의 문집색인 작업이라는 말은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하여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듯싶다. 다만 윤남한교수의 정열과 태도를 보고 중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 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한국의 기라성 같은 이분들과 장장 8시간의 토론을 벌였다. 당시 나는 겨우 대학에 자리 잡은 지 2년쯤 되는 시점이었고, 평균 나보다 15년에서 20년 윗분들이었으니 참으로 조심스러운 모임이었다. 이때에 모인 분들로 생각나는 분으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계신 분들을 제외하고도 국민대학의 허선도 교수님, 성균관대학의 천혜봉 교수님, 심우준 교수님 같은 분들이 계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과 문집색인작업 가운데 10권 가운데 첫째권인 잡저기설류기사색인의 편찬을 위한 지원이 결정되었다. 지원금은 800만원이었다. 나는 아직도 신임교수인 처지에 다시 이 작업에 3년간 매달려야 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지금 안동 國學硏究院에 있는 朴焞선생이 내 助手로 수고를 했다. 그리고 정신문화연구원 측에서는 후에 한국학연구원의 교수가 된 최진옥 선생이 이 작업에 관련된 일을 돕는 조수였다.
3년 동안의 작업을 마치고 원고를 자동차에 싣고 정신문화연구원에 갔을 때에 당시 마크V 승용차의 뒷 트렁크에 가득 찬 원고를 보고 ‘정말 많긴 많군!’하는 것이었다. 듣기만 했던 것을 실제로 보고 대단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책은 또 오랜 교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국배판 2400쪽으로 출간되었다. 5000부를 찍었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이 윤남한교수가 생전에 나왔다면 내가 공편자로 발간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윤 교수님은 작고하기 전에 이미 이 책의 서문을 써 놓았으며, 거기에 나를 공편자로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돌아가신 마당에 나는 공편자가 되는 것을 사양해야 했다. 다만 말미에 後記만을 썼을 뿐이었다.
그 후속으로 나머지 9책 분량이 남아 있었지만 정신문화연구원 측에서도 고생을 심하게 하였는지 손사래를 쳤다. 윤남한교수의 사모님은 남은 카드를 나에게 주면서 나머지도 기회가 있으면 정리하라고 했지만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도 그냥 연구실에 보관하고 있었고, 퇴직 후에는 잘 포장하여 우리 집 지하실에 쳐 박아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선우휘선생과의 만남
한국문집 잡저기설류 기사색인이 출간되고 나서 이 내용을 조선일보에서 취재하여 박스기사로 기사화되었다. 또 당시 주간조선에서는 문학평론가인 김종호선생이 主幹이 되면서 한국의 현대 인물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작업을 하였다. 맨 첫 번째로 뽑은 분이 유영모선생이었고, 함석헌선생도 그 중에 있었다. 그리고 고려대학교의 조지훈선생을 싣고 나서 윤남한교수에 관한 내용을 내게 써 달라는 청탁이 왔다.
나는 윤남한교수에 관하여 60매 정도를 썼고, 후에 조선일보에서는 이때에 연재된 사람들을 간추려서 ‘한 시대의 이단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아마도 그래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싶었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이단자라고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단자라는 말이 조금은 거북했던지 후에 ‘잊을 수 없는 스승들’이라고 제목을 바꾸었지만, 하여간 여기에 내가 쓴 윤남한교수에 관한 글이 실렸다.
그러한 일이 있어서인지 어느 날 조선일보의 선우휘 칼럼에 윤남한교수를 거론하면서 내 이름을 썼다. 내 이름을 거론하면서 이러한 학자를 도와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취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침 그 칼럼이 실린 날 나는 유성온천에서 동양사학회 동계연찬회를 하는 중이었다. 이 연찬회는 내가 주선을 하여 중앙대학교 중앙문화연구원에서 지원을 하였는데, 마침 학교에서 시험의 출제위원으로 들어가야 하니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아서 권석봉 교수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와야 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에 선우휘 선생이 나를 불렀다. 그는 당시에 조선일보 논설고문직을 맡고 있었는데, 나를 만나보고서는 언론과 좀 가까이 하라는 말을 하였다. 당시에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몰랐다. 내가 쓴 윤남한교수에 관한 글을 읽어서였는지 모르지만, 당시 나는 교수에게 언론과 가까이 하라는 말이 가당치도 않다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한 참 뒤에 많은 교수들이 기회만 있으면 언론과 가까이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선우휘선생의 말대로 내가 그분을 가까이 하면서 언론과 많은 관계를 맺어갔더라면 아마도 학자로서의 인생은 계속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되어 내 스스로 잘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연구자세의 터득
윤남한교수는 역사공부는 궁둥이가 무거워야 된다는 말을 했다. 윤교수님이 논문을 쓰거나 하다못해 잡문이라도 쓰게 되면 나는 그 옆에서 淨書하는 일을 맡곤 하였다. 그분은 원고를 쓰고 고치는데, 글씨가 유난히 작은데다 교정한 것이 뱀 꼬리를 물 듯 이어가 있었고, 이것을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정서해야 하였다. 원고 한 편을 쓰면서 그러한 작업을 대여섯 번씩 하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러나 이를 통하여 나는 자연스럽게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대체로 휴일이면 윤남한 교수 댁에 가서 그 서재에서 작업을 하였다. 그 작업은 문집 작업일 때가 대부분이지만, 다른 원고를 정리하는 작업도 했다. 한번은 주말이 다가 올 때에 학교에서 일요일 아침 9시까지 윤교수댁으로 가기로 약속했었다. 그것은 일상적인 것이니까 별다른 생각 없이 약속한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날이 되어보니 바로 추석이었다. 선생님도 잊고 나도 잊고서 한 약속이었다. 그날만은 나는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댁으로 가서 하루 종일 작업을 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연구에 대한 연구자의 태도를 교육시키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후에 대형프로젝트를 겁 없이 하겠다고 나서게 된 것은 이때에 받은 훈련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전공의 결정
학부과정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대학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윤남한교수와의 작업과정을 보면서 주위에서는 당연히 대학원을 갈 것이고 그것도 동양사를 전공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입학시험을 치려고 개설 책이라도 한 번 더  봐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윤교수에게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더니, ‘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려고 따로 공부하려거든 공부 그만두라’는 핀잔만 받았다. 그래서 입학시험 이틀 전까지 例의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은 ‘王夫之의 史論’으로 하였다. 사실 학부 4학년 때에 동양사 연습이란 과목은 논문 쓰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는데, 별 생각 없이 수업시간에 왕부지를 주제로 맡았었다. 그러한 것이 인연이 되어서 석사논문을 왕부지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 왕부지의 그 많은 저작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없었다.
소공동에 있는 중국 책방에서 겨우 몇 권을 구하였고, 대만에 가는 인편에 책 몇 권을 부탁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주로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논문이나 책을 빌려 보아야 했다. 당시에 왕부지에 관한 글을 쓴 사람은 연세대학교의 황원구 교수님이 왕부지의 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쓴 짧은 글이 있었을 뿐 그 외에는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듯하다.
이 논문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전통적인 經書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읽는데 건듯하면 詩經이다, 書經이다, 周易, 春秋가 튀어 나오는데,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만으로 공부를 하러 떠날 때 윤교수님은 나에게 經傳공부를 하고 오라고 일러 주었다.
사실 대만에 가 보니 역사연구 방법론은 한국에서 익힌 것으로 가능할 것 같았는데, 경서만은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틈틈이 경서를 익히기는 했지만 마침 대만대학에서 철학교수를 하다가 그만두고 課外하는 교수가 있어서 찾아 갔는데, 그 분이 강의하는 날이면 밤에 40~50명이 모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때 인상 깊게 들은 것은 經書의 한 구절을 가지고 성리학자, 양명학자, 고증학자들의 해석이 각각 달랐다는 점을 강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주자학적 해석 일변도인 한국인들의 경서 이해와 해석과는 차원이 전현 다른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몇몇 친구들과 唐君毅 교수의 중국철학원론을 읽는 일이었다. 한번은 직접 당교수댁을 방문한 일이 있었지만 하여간 이 책이 참으로 어려웠다. 중국어로 썼는데, 어찌 그리 어렵게 썼는지 문장을 배배꼬았다고 할까? 당군의 교수는 독일에서 서양철학을 연구하고 돌아와서 중국철학을 서양철학의 연구법으로 쓴 것이어서 어려웠던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생각도 해 보지 못한 해석들이었다.
하여간 고생을 하면서 3년 동안 꼬박이 읽었다. 같이 읽은 멤버 가운데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많아서 나와는 항상 논쟁을 했다. 나는 철학적 논리는 역사적 환경 속에서 나타났다고 생각했지만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논리의 전개만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를 통하여 중국철학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러한 공부가 중국사상사와 동양사학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 하나는 杜維運교수를 만난 것이다. 그분은 그야말로 연구밖에 모르는 분이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사학이론을 연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학방법론을 썼다. 후에 나는 이것을 번역하여 ‘역사학연구방법론’이란 제목으로 일조각에서 출판하였고, 이 책은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한번은 동국대학교의 이기동교수를 만났더니, 동국대학교 대학원시험에서는 이 책을 지정하여 시험과목에 넣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책은 귀국하였을 때에 신임교수인 나에게 史學槪論을 강의하라고 하는 바람에 두유운교수의 사학방법론을 가지고 대학 1학년을 상대로 한 3년 동안 강의했던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할 것이다. 이 강의는 당시로서는 학생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후에 제자들에게서 들었다. 1990년 이후에는 대학원학생들에게 읽혀 봤는데도 어렵다고 한 것을 어떻게 대학 1학년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는지 지금도 모를 지경이다. 생각해 보면 그 때 그러니까 1980년대 초반의 학생들은 어느 정도 수준이 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대만에서 박사논문의 주제는 자치통감으로 하였다. 석사논문에서 왕부지의 讀通鑑論을 중심으로 史論을 썼는데, 독통감론은 자치통감을 읽고 쓴 평론이었기 때문에 그 평론의 바탕인 자치통감으로 올라간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주로 자치통감이 탄생하기까지의 북송 정치적 상황과 자치통감의 편찬을 맞물러 가면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논문의 분량은 꽤 많아서 중국어로 500여 쪽 되었다. 근 40년 뒤에 자치통감을 완역하고 나서 이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조금 손을 보아가지고 ‘資治通鑑傳’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출간하였는데, 850쪽 정도가 되었다. 지금도 자치통감에 관하여 비교적 종합적으로 서술한 것은 이것이 거의 유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덕택에 중국대륙에 있는 교수도 내 소문을 들은 듯하다. 얼마 전에 한 출판사에서 나를 찾아왔다. 용건은 중국 칭화대학 교수가 일반인을 위하여 자치통감에 관하여 책을 냈는데, 우리나라 출판사가 번역 출판하려고 하자 나에게 監修를 한 다음에 내라고 조건을 달았으니 감수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책을 감수하려고 검토해 보니 이 사람은 자치통감 권69에 있는 사마광의 사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마광은 客觀的 역사학을 지향하고 있었다. 객관적 역사학이야 말로 우리가 역사를 읽어서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특히 제왕된 사람과 지도자의 편향된 역사관이 가져 오는 폐해가 말 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객관적이지 못한 傾度된 역사관을 가진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 잘 못을 저질렀는지를 절감하고 있는데, 벌써 11세기에 객관적 역사관을 지향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사마광은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를 논하면서 남조에서는 북조를 索虜라고 비난하고, 북조에서는 남조를 島夷라고 하는데,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漢族으로서는 참으로 하기 어려운 말을 한 것이고, 이 말은 진정으로 제왕을 위하여 들려 준 말이었다.
그 후에 朱熹가 종족주의적 역사관으로 이 책을 재편하여 綱目을 썼고, 주자학을 盲信하게 된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 편협한 종족주의를 심어 준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현대를 사는 대륙학자의 역사시각도 漢族主義的 視角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점이 내 視角과 좀 다르기 때문에 거절했더니 해제라도 써달라고 하여 써준 일이 있다.

중국사상사연구
나는 중앙대 출판부에서 중국근세사상사연구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는 그 동안 단편적으로 써 왔던 논문을 조금 손을 보아서 묶은 것인데, 결국은 宋代에서 淸중엽인 18세기까지의 유학사상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철학사와 사상사를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철학사는 철학사상의 논리적 변화과정을 연구한 것이라고 한다면, 사상사에서는 철학논리를 변하게 만든 역사적 환경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사에서는 元代의 철학은 무시하고 넘어 가는 경우가 많지만 사상사에서는 원대에도 내세울 철학사상은 없다고 하여도 사람들의 생각, 사상은 있었으므로 역사 환경의 변화에 따른 철학사상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꼭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원대의  魯齋 許衡과 靜修 劉因을 대비하면서 주자학에 대한 태도의 차이를 살펴보려고 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고려 주자학과 조선 주자학의 성격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부분에 관하여 아직도 우리 학계에서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또 성리학의 등장을 송대 사회경제의 변화와 짝하여 이해하려고 하였으며, 주자학의 성격을 금왕조에 쫓겨 내려온 남송의 정치적 환경과 관련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환경이 주자학을 종족중심의 역사관을 갖도록 만들었고, 그것이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배타주의로 달려가는 문제를 내포하게 되었음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명대에 와서 양자강 유역을 근거로 발전한 정수 유인계의 주자학자들이 명왕조와 결합하였고, 이들의 주자학은 거의 종교적 편향성을 띠는 주자학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남긴 자료는 讀書錄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주자학은 그 이론적 발전에 정체성을 가져 왔고, 이것은 후기로 오면서 양명학이 나 올 수 밖에 없는 정치 사회적 환경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였다. 또 명말청초에 탄생한 새로운 고증학은 성리학과 심학, 즉 性과 心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제시가 고증학을 탄생시킨 것이라는 것도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청 중기에 와서 浙東학파의 역사학과 浙西학파의 철학으로 나뉘는 문제를 다루었다. 이 문제에 관하여서는 고염무에서 장학성에 이르는 절동학파의 계통을 밝히려고 하였지만 손을 대지 못하였다. 대신 최근에 청대사학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는 필원의 속자치통감은 절동학파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이 작업은 이러한 역사사상사의 미완의 숙제를 하는 셈이다.

자치통감의 역주
자치통감은 나의 학위논문의 주제인 점에서 이를 역주하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300萬字라는 巨帙에 손을 대기가 어려워 마음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근무했던 중앙대학교에 1987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재단을 이끌어온 사람이 막대한 빚을 지어서 대학이 재일교포인 김희수씨에게로 넘어갔다.
당시에 재단의 빚이 학교의 3년간 예산과 맞먹을 정도였으니 대학의 발전은 꿈도 꾸기 어려웠는데, 재단 이사장이 바뀌면서 이 빚을 다 청산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나는 근 10년 동안 학교 일을 맡아야 했다. 연구관계의 일에서부터 잠간 동안이지만 학생처 업무를 맡았었다. 그리고 도서관 업무를 맡는 동안에는 개가식도서관을 만들었는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기획실 일이었다. 이 일은 상대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은 자리였다. 학생, 교수, 직원, 재단, 동창, 하다못해 외부 경찰이나 그 외 다른 사람도 만나야 했다. 이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교수들만 진정한 연구자, 교육자가 된다면 10년 이내에 일류 대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대학의 발전을 위하여서는 교수를 정비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생각하였지만 후에 보니, 많은 교수들은 겉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10년 동안의 보직생활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왔을 때에 남은 10년의 교수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그때 나는 논문 몇 편을 쓰기 보다는 일생을 가져 갈 수 있는 주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자연스럽게 자치통감의 역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작업은 후에 학술진흥재단의 도움으로 내가 정년하는 마지막 해 12월까지 완역 보고서를 낼 수 있었다.
정년을 하고 나서 이 책을 출간할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였다. 손을 대려고 했다가 그만 두는 곳이 여럿이었다. 마지막에 결국 자비 출판하기로 마음먹고 가족을 설득하여 출판사를 차렸다. 초기에 출판에 관하여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지불되었고, 때문에 퇴직금도 다 들어갔으면서도 고생을 해야 했다. 그래도 4~5년이 걸려서 완간하게 되었다.
내가 자치통감의 역주와 출간에 힘을 기울인 것은 윤남한교수 視角의 영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논문을 보면 지극히 미시적인 접근이었다. 즉 點의 연구였다. 그 점이 전후, 좌우, 상하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하는 지에는 그다지 큰 신경을 안 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점의 연구는 전체 속에서 그 점의 위치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데, 전체를 모르고 점만을 연구하니 도대체 그 점이 고대에 속한 것인지 중세에, 혹은 근세에 속한 것인지를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이것은 조선시대사를 연구하면서 조선왕조실록의 일정한 부분을 통독하지 않고 시작하는 것과 같다. 적어도 개설에 해당하는 배경지식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개설도 읽지 않고 쓴 논문 같은 것을 보게 된다. 같은 관점에서 자치통감은 아시아사를 연구하면서는 반드시 한 번쯤 통독하고 지나가야 할 책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원전으로 읽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걸리니까 이를 우리말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근 20년 동안 이 일에 매달리게 하였다고 본다.
더욱이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은 레이황(중국명 黃仁宇)의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 하다.’라는 책을 읽고 후에 번역까지 하면서부터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의 의견에 찬동하였다. 때문에 더욱 이 일에 대한 사명감 같은 것을 갖게 된 것이다.
작년부터 다시 畢元의 속자치통감의 역주를 시작하여  전체 220권 가운데 30권을 완역하여 출간하고 매년 이러한 정도씩은 역주하여 출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책이 18세기 고증학의 결정판이고 당시 일류 학자들이 거의 다 동원된 책이다.
특히 이 책은 북송에서부터 명초까지 400여 년간의 편년체이므로 우리나라로는 고려시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데는 필수 불가결의 책으로 보인다. 이 책을 역주하면서 필요한 부분에서는 고려사, 요사, 송사, 금사, 원사를 대조하고 있다. 그동안 번역한 것만 가지고 보아도 고려사의 오류를 여러 곳에서 발견하였다. 또 속자치통감 자체도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18세기 청대 고증학자가 다 동원되었음에도 이러한 오류가 있는 것은 당시에는 비록 四庫全書가 정리되어 이를 참고할 수 있었다고 하여도 수작업을 할 수 밖에 문명의 수준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또 내가 그 기라성 같은 역사가들의 저작에서 오류를 찾아 낼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문명의 利器 때문이다.

자치통감 완역의 落穗
자치통감을 완역하여 원문 294권을 전체적으로 31책으로 묶고 여기에 앞서 말한 ‘자치통감전’을 합하여 전 32책을 완간한 것은 2010년이었다. 이 작업을 끝낸 다음에 자치통감 역주한 결과의 낙수로 몇 권을 책을 썼다.
첫 번째 책은 ‘자치통감사론강의’였다. 자치통감에는 사마광을 비롯하여 역대 史家들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하여 그 사건을 서술한 다음에 평론을 싣고 있다. 이 평론의 숫자는 218 편이고, 평론을 쓴 史家도 35명이었다. 역사사건의 서술은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나서 필요한 대목에는 사마광이 직접 평론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미 이전에 평론한 것이 있으면 이를 가져다가 실은 것도 있다.
이 평론부분을 한번 정리하고 싶었는데, 완역을 하고 나서 우선 이 작업을 해야 했다. 평론을 한 부분에 대한 역사사실을 먼저 간략하게 설명하고, 이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론을 우선 실은 것이다. 그 다음에 이 역사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하고, 이를 평론한 역사가의 입장이 어떠하였기 때문에 평론이 이러하였는지를 따져 본 것이었다.
분량은 대체로 600여 쪽짜리 상하 두 권이었다. 상당히 두꺼운 책임에도 매진되어 종이 책은 한권도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절판되어 전자책으로만 판매하고 있는데, 어느 금융계의 CEO는 이 책을 읽고 구매하여 자기 그룹의 임원들에게 읽도록 권고하였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다음으로 정리한 것이 ‘자치통감행간 읽기’라는 몇 권의 책이다. 자치통감을 그냥 한 번 읽는다면 그 속에 숨겨진 뜻을 파악할 수 없는 일반 독자를 위하여 쓴 것이다. 모택동이 자치통감을 17번 읽었다고 하는데 그는 이 책을 읽을 적마다 각기 다른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려 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독자에게 모택동처럼 17번씩 읽기를 권고하는 것은 무리한 기대이고, 그렇다고 깊이 숨은 행간을 파악하지 못하고 겉핥기식으로 읽는 것도 차마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행간읽기를 쓰기로 했던 것이다.
첫째 번으로 쓴 것은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이다. 이는 사실 사상사이다. 왕조가 성립하면서 집권자들은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고 사상을 이용한다. 그것이 주대의 예교사회, 춘추전국시대의 자유분방한 시대, 秦漢의 국가통제 시기를 거치면서 자유와 통제의 순환과정을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위진시대의 죽림칠현의 등장은 너무 당연한 결과였고, 이것이 역사의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상을 시대적인 산물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儒家적 視角에서 위진시대는 타락한 시대라고 치부하였던 것이 역사를 잘 못 읽은 것이라고 보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쓴 책은 ‘중국분열’이었다. 이는 중국의 통일과 분열이어야 했지만 제목은 분열만을 강조한 셈이다. 그것은 그동안 중국사는 통일지향적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분열은 비정상적인 시기쯤으로 인식하였던 잘 못을 지적하려 한 것이다. 역사는 遠心力과 求心力이 상호 작용하면서 진행되는 것인데, 그동안은 통일지향적이라는 다소 意圖된 시각만으로 본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아시아역사가 漢族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잘 못된 인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결과 통일왕조라는 前後漢 400년과 300년이라는 唐代도 그 절반 정도는 끊임없이 원심력이 크게 작용하여 분열 상태였음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다음에 쓴 책은 ‘황제 뽑기’였다. 왕조를 개창한 태조를 제외하고 황제의 혈육이 다음 황제의 자리를 이어 받는다는 황제세습제 속에서도 외척과 중신들이 어떻게 다음 후계자를 결정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 본 것이었다.
그 결과 외척과 중신들이 결정한 후계자는 강한 왕조를 이어갈 똑똑한 사람을 선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약하여 자기가 휘두를 수 있는 인물을 선정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을 밝히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여자를 남자라고 거짓말하며 황제에 자리에 앉히려고 하거나 생후 9개월짜리 갓난아이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전 시대에 걸쳐 있었다.
다음에 시도한 것이 ‘평설자치통감’이다. 이 책인 자치통감의 원문과 이에 해당하는 통감절요, 그리고 통감강목의 원문을 먼저 비교하여, 통감절요와 통감강목에서 빼버린 부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이를 빼버리면 역사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평론하여 나간 것이다. 말하자면 통감절요나 강목을 읽어가지고는 얼마나 자차통감을 誤讀하게 되는 지를 살펴보려고 한 것이다. 예컨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일식의 기록도 기록할 이유가 있음을 살펴 본 것이다. 이 책은 권1부터 권8까지만 하다가 시간이 부족하여 일단은 중단하였다.
그 외에 일반 대중을 위하여서는 자치통감 각 권에서 하나씩 사건을 골라서 모두 294개의 사건을 서술한 ‘자치통감 294’가 있고, 자치통감 속에서 명언을 골라서 해설한 자치통감명언집 ‘촌철활인’이 있으며, ‘자치통감산책’도 있고, 중국사에서 역경을 딛고 생존하였던 7명의 이야기를 담은 ‘생존’이 있다. 또 ‘자치통감전’을 간략하게 줄인 ‘자치통감 세 번 태어나다.’가 있다.

번역한 책과 기타
제일먼저 거론할 책은 두유운의 ‘사학방법’인데, 이는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다음으로 번역한 책은 錢穆선생의 ‘국사신론’을 ‘중국사의 새로운 이해’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전목선생이 중국사를 7개 부분으로 나누어 通觀하면서 쓴 것이다. 분량은 길지 않지만 중국사를 보는 안목을 기르는데 좋은 책이었다.
다음으로 번역한 책은 ‘중국문화대혁명전후의 역사인식’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중국대륙이 공산화된 다음에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하여 역사를 해석하려는 문제를 다룬 것이다. 역사를 이념으로 해석하려는 모순을 철저하게 지적한 점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레이황의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라는 책이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2002년 9월에 출간되었는데, 그해 12월까지 겨우 3개월에 무려 10쇄 이상을 찍었으며, 중앙일보에서 그해의 히트상품으로까지 선정하였다.
정년한 뒤에는 중국과기대교수로 천안문사태의 주범으로 몰렸던 천문학자 팡리즈(方勵之)의 ‘우리는 지금 역사를 쓰고 있다’라는 연설집과 ‘팡리즈자서전’을 번역 출간하였다. 모두 현재 중국의 통제 상황을 직접 경험한 그가 구체적으로 쓴 것이어서 중국현대사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귀중한 자료로 보인다.
학회에서 여러 사람이 공동집필하거나 공동 번역한 책으로 ‘명말청초 사회의 변화’와 후핑티(何炳棣)의 ‘중국 과거제도의 사회사적 연구’가 있으며, 동양사학회 임원으로 있을 때에는 ‘중국사개설’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역사학의 제자리 찾기를 위하여
역사학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꽃 피우기 위하여서는 두 가지를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역사학이 오늘날 누구에게나 필요한 학문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역사학은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현재 우리시대에 아주 많은 사람들은 역사학은 비실용적인 학문이라고 인식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독한 가난한 시절을 겪으면서 당장 코앞에 닥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했던 과정을 겪으면서였다. 이 시절에는 내일을 생각해 볼 수 없는 시절이었으므로 당연한 인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른 바 實業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역사학은 물건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장사하고 돈 계산하는 능력을 향상시켜 주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학의 연구를 비실용적인 학문이라고 낙인 되었고, 그러한 인식은 아직도 여전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이른 바 실용학문이라는 곳으로 몰려든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실용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후에 나이가 들어서 혹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여도 그 관심 수준은 대단히 낮다. 기껏해야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아는 것이 역사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공부란 변화에 대한 공부이고, 변화의 조짐을 찾아내는 공부이며, 이러한 공부는 일상생활에서도 당연히 통용되고 응용될 수 있는 지식이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공부야 말로 차원 높은 실용 공부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역사공부는 비실용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에 역사가 비실용적인 학문이었다면 왜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역사책을 꾸준히 써 왔을까 하는 의문을 풀 수 없다. 그것은 어디엔가 써 먹을 데가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비실용적인 학문이 아니고 보다 먼 안목으로 조망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실용학문인 것이다.
우리의 사회경제적인 수준에서 볼 때에 미래를 조망해 볼 필요가 있는 수준에 와 있음에도 과거에 역사학에 대한 잘 못된 편견 때문에 역사학을 백안시한 사람들이 사회를 이끌어 가게 되니 새로 다가오는 시대에 제대로 대체하지 못하는 상황이 곳공세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제부터라도 역사학을 수준 높은 실용학문으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역사학은 스스로 객관성을 최대한 유지해야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학에서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遠因은 일제강점기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일제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우리역사를 이용하여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했다. 말하자면 역사를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역사학이란 애국심의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또 남북분단과 관련하여  역사학이 이념을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역사를 이용하여 그의 이념을 증명하려 든 것처럼 우리 사회에도 거꾸로 마르크스 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재단하는 일이 난무한다. 이 도한 역사가 이념의 종속이 된 것이다.
사실 역사는 정치, 경제, 사회 만 아니고 사상과 이념 또는 종교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상위 개념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사상이나 이념이 사회를 이끌어 가기 보다는 사상이나 이념은 유구한 역사에서는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역사학은 민족이나 이념, 종교의 변화를 거에게서 초월한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시각인 것이다. 지금부터 1천여 년 전에 사마광은 이미 객관적 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봤는데, 아직도 역사를 민족이나 이념, 종교의 하위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의 후진성이다. 역사학이 불편부당한 본래의 위치를 차지할 때에 비로소 존중받을 수가 있고, 그것이 인류와 인류문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학이 비실용성이라는 부분과 이념의 종속으로부터 독립하여야 비로소 역사학이 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2018/10/07]

통감원문강의 유튜브
통감원문 강의의 녹음을 이용하시고자 하는 분은 유튜브에서 '권중달'을 치시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혹 궁금하신 것이 있으면 사랑방의 토론방을 이요해 주십시오,
[2018/10/07]

유튜브 설정
'자치통감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지난 5년간 강독하면서 가감없이 있ㅆ는 그대로를 녹음하여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전혀 편집되지 않아서 듣는 분들은 조금 불편하겠지만 강독하는 분위기를 사실대로 전한다는 진솔한 마음에서 취한 조치 입니다.
그동안 녹화도 해 봤는데 용량이 너무커서 녹음만 하기로 했지요.
이렇게 녹음한 것이 이제 순서대로 올라 갈 것입니다. 회원 가운데 이 일을 봉사해 주는 분이 계시기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018/10/07]

자치통감을 사랑하는 모임
지난 5년간 '자치통감을 사랑하는 모임'에서는 매주 두 시간씩 자치통감 원문을 읽고 해석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 왔습니다.
현재 회원은 대부분이 다른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분들입니다. 이 모임이 한층 수준 높게 운영하려고 회원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을 이야기 하는 시간도 가지려 하고 있습니다.
[2018/07/27]

증보자치통감 출간
자치통감을 완간하고 벌써 7~8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개중에는 원문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고자 원문을 책말미에 붙이고, 주석도 증보하는 작업을 거쳐서 원문을 6권씩 묶어서 "증보자치통감"으로 편집하였습니다.
8월 초에 네 책 1~24권까지를 출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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