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황제에 오른 여(戾)태자의 손자 ; 선제(宣帝)
앞에서 말 했거니와 한 무제(武帝)는 강충이 일으킨 무고(巫蠱)의 난을 통하여 자기의 아들인 여(戾)태자를 공격하여 죽이는 비극을 겪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태자의 아들인 손자까지 죽었고, 그의 아들 즉 무제의 증손자로 강보에 싸인 유병기(劉病己)도 감옥에 갇혔다.
따라서 혈통상으로는 무제의 증손자이지만 언제 죽을지 모를 위기에 처해져 있으므로 그 외가(外家) 사람들도 대부분 화를 만나야 했다. 그런데 유병기는 병길(丙吉)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드디어는 그 외할머니와 외삼촌에게 맡겨진다.
그 후 무고(巫蠱)의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알려졌고, 무제도 후회하여 명목상으로는 무제의 증손자라는 것이 인정되었지만 권력으로부터는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 권력을 쥔 사람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장성하여도 명문대가에서는 딸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허광한(許廣漢)이 아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기의 재산을 들여서 황증손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어 자기의 딸을 맞아들이게 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권력에서 먼 곳에 있는 처지였고, 그러한 생각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허광한과 외조모 등의 도움을 받으며 시경(詩經)을 배웠지만 다만 유협(遊俠)을 좋아 하면서 민간에 섞여 살면서 사회에 있는 간사한 일들이나, 하급관리들의 장단점도 경험하게 된다. 여전히 신분만 높고 재산과 권력은 없는 신세였고, 가끔 조회에 참여하는 일만 있었다.
그러나 세월 속에서 8세에 무제를 이은 소제(少帝)가 23살이 되어서 후사 없이 죽자 다시 황제를 세우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권력자인 곽광은 무제의 아들로 창읍왕으로 있는 유하(劉賀)를 황제에 오르게 하려고 모셔오게 하였다. 이 때에 아직 소재의 상중(喪中)이었는데,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도 수레에 여자를 감추어 싣고 왔고, 곡을 할 때에는 목이 아프다고 핑계를 댔다.
창읍왕 유하는 황제에 오른 다음에 창읍왕 시절에 그를 좇던 파리 떼 같은 사람들을 정리하지 못하였다.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창읍왕 시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공수나 장창 같은 사람이 진심으로 충성스럽게 간언(諫言)을 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결국 여론은 들끓었고, 홍범전에 나오는 말이 근거가 되었다. ‘황제가 올바르게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하늘이 천벌을 주려고 항상 구름이 끼게 할 것이니 그때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 곽광은 황제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다시 창읍왕으로 돌려보냈다. 그를 좇던 사람들은 황제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다는 죄에 걸려들어 200명이 사형을 받았다.
황제에 올랐다가 몇 달이 못 되어 쫓겨난 창읍왕은 황제가 되었지만 시호를 받지 못하여 창읍왕으로 불려지지만, 한나라 조정에서는 후임 황제를 가려 뽑는 일이 급했다. 이 때에 재상의 자리에 있던 병길이 나섰다. 권력자인 곽광에게 무제의 증손이고 장손이었으므로 황제에 오르기에 충분한 유병기를 추천하였고, 드디어 황제가 되었다. 이 사람이 한 나라 시대 가운데 가장 정치가 잘한 사람으로 알려진 선제(宣帝)이다.
그러나 선제가 황제에 올랐다고 하여도 정치의 실권은 곽광에게 있었다. 곽광의 처는 이미 황후가 되어 있는 허광한의 딸을 독살하고 자기의 딸을 선제에게 시집보내어 황후로 삼았다. 힘없는 황제는 그저 잠자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세월이 흘러 곽광이 죽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곽황후는 쫓겨나고 곽광의 처는 처벌을 받았다.
선제가 된 죽음의 위기를 넘기었던 유병기와 황제에 올랐다가 쫓겨난 창읍왕 유하, 그리고 권력을 잡고 황제를 선택하였던 곽광, 그 속에서 딸을 황후로 삼고자 황후를 독살한 곽광의 처, 황증손의 어려움을 끝까지 보살핀 병길의 인간상들이 이 한 사건에 걸려 있다.
오늘날에도 개개인은 아마도 이 몇 개의 인간상의 어느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스스로 어떤 군상에 속해 있는가를 되짚어 봄도 의미 있는 일일 듯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