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한나라에 반기를 든 오환족
한(漢) 나라의 북방에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 북쪽에 동호족(東胡族)이 살고 있었고 그 서쪽에는 흉노족(匈奴族)이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201년경에 흉노족의 난제모특 선우(單于)가 동호를 격파하게 되자 대부분은 흉노에게 복속(服屬)되었고 그 나머지 무리들은 오환산(烏桓山)과 선비산(鮮卑山)을 점거하고 각기 부족을 이루면서 대대로 살고 있었다.
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들이 살고 있는 왼쪽지역을 격파하고 오환지역에 사는 족속을 상곡(上谷), 어양(魚陽), 우북평(右北平), 요동(遼東)지역에 있는 요새(要塞)의 밖으로 옮겨 살게 하면서 흉노의 동정을 살피고 한나라에 알려 주게 하였다. 또 이 오환족을 감독하기 위하여 호오환교위라는 관직까지 두어서 북방지역에 사는 이민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오환족은 그 동안 힘을 점점 키워서 강성해 졌고, 한(漢) 나라 소제 때인 기원전 79년에 이르러서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독립운동인 셈이다.
이 당시의 국제사정을 보면 흉노는 자주 내몽골지역을 습격하여 사람을 잡아가기도 하고, 수렵을 하기도 하였지만 이곳은 요새지역의 밖이었고, 한 나라는 봉화를 아주 잘 만들어 놓아서 흉노들은 요새지역까지는 습격하지 않았다. 이 때에 또 다른 정보가 한 나라에 들어왔다. 오한족이 흉노 선우의 무덤을 도굴했기 때문에 흉노가 원통하게 생각하여 2만 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오환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선우란 흉노들의 최고 수장(首長)을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무덤을 도굴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한 나라의 입장에서는 한나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환족의 문제와 흉노가 한나라 국경까지 가까이 오는 문제를 놓고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로 논의가 분분하였다. 이 때에 권력자는 곽광(霍光)이었는데 먼저 호군도위인 조충국(趙充國)에게 물었다.
조충국은 오환족이 반란하였는데 흉노족이 이를 친다면 좋은 일이고, 흉노족은 한 나라의 변방을 침구하는 일이 드물었으니 이 두 족속 간에 싸우는 일에는 간섭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나라의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랑장인 범명우(范明友)의 입장은 공격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곽광은 범명우를 도요(度遼)장군으로 삼아서 요동지역으로 2만 명의 군사를 출동시켰다. 떠날 때에 곽광은 범명우에게 ‘군사란 출동하였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아니요. 흉노를 치는 것이 늦었다면 바로 오환이라도 치시오.’라고 했었다.
한나라 군사들이 출동하자 오환을 수중에 넣고 있던 흉노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돌아가 버렸다. 범명우는 흉노가 물러간 오환지역에 도착하여 보니, 오환족은 흉노와 싸우느라고 지쳐 있었다. 범명우는 바로 오환족을 공격하여 6,000명의 목을 베고, 오환의 왕 세 명의 목도 베었다.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지친 오환을 없앤 것이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무리하게 대우하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국제 사회는 냉엄하다. 오직 힘만이 말해 줄 뿐 그 나름대로의 입장을 이해하여 달라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일이었다. 오환족에게는 독립을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동시에 힘이 모자라면 충분한 힘을 기를 때까지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신중한 태도도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 요즈음 세태를 보면서 국가 이익을 생각하는 조금은 신중한 행동이 필요할 듯하다. 국가 지도자 가운데 국제 정세를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이 사람들에게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진정한 뜻을 아는지 모르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