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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한 무제 때의 만석군(萬石君)

<제17회> 한 무제 때의 만석군(萬石君)

                                
말 잘하고 글잘 쓰는 사람과 그런 것을 잘 못하여도 실천을 잘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또 누구를 채용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항상 있는 것이지만 한나라 무제 때에도 이러한 문제가 있었다.

한 나라 때의 무제는 말을 화려하게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하였는데, 당시에 80세가 된 신공(申公)이라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천거를 받자 비단 옷에 옥을 달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안거(安車)를 보내어 영접하였다.

이 사람이 도착하자 무제는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신공은 간단히 말하였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많은 말을 하기 보다는 어떻게 힘써 실천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제에게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초청하여 모셔 온 터라 태중대부라는 벼슬을 주어서 있을 집만 마련하고 별로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았다.

그러나 태황태후인 두태후는 오히려 말만 잘하는 사람을 싫어하였는데, 말 잘하는 조관이라는 사람과 왕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간사하게 이익이 남는 일에 간여하였던 일이 들통이 나자 황상을 나무랐다. 그리하여 무제는 태황태후 두씨의 말에 순종하고자 ‘만석군’을 채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석군’이란 한(漢) 나라 때에 태자태부라는 태자의 스승인 석분(石奮)이라는 사람과 그이 네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사람과 그의 네 아들이 모두 2천석의 녹질을 받는 지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4명 도합 다섯 명이 모두 2천석의 녹질을 받는 벼슬에 있었으므로 그 집안은 도합 1만석의 녹질이 받는 셈이어서 사람들은 이 집안을 ‘만석군’이라고 불린 것이다.

이 만석군은 글을 배운 바는 없었지만 공손하고 조심하는 점에서는 그와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그의 자손들은 낮은 직급의 관리<小吏>이었지만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와 아들이 만날 때에도 만석군은 반드시 조복(朝服)을 입고 만났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자손에게 과실(過失)이 있으면 나무라는 대신 옆방에 앉아서 밥상을 마주한 채 밥을 먹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 여러 아들들이 서로 잘못을 지적하게 하고 그 가운데 제일 윗사람이 웃옷을 벗고 사죄한 뒤에 이를 고치고 나서야 밥을 먹었다.

자손 가운데 관례(冠禮)를 치른 사람이 옆에 있으면 비록 한가하게 있는 때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관(冠)을 썼다. 관례를 치렀으므로 어른 이 된 것이고 어른이 되었다면 그에 걸 맞는 대우를 한 것이었다. 또한 상례(喪禮)를 집행할 때에는 슬퍼하고 심히 애도(哀悼)하였다. 자손들은 그의 가르침을 준행하여 모두 효자로 군이나 나라에 두루 소문이 났다.

무제는 당시 태후였던 두태후는 유자(儒者)란 글재주는 많으나 질박함이 적다고 말하던 차에 지금 만석군 집안에서 말없이 몸소 실천한다고 하자 마침내 그 아들인 석건(石建)을 낭중령으로 삼고 석경(石慶)을 내사(內史)로 삼았던 것이다.

석건은 황상의 옆에 있을 때에도 말씀드릴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곁에 없을 때에 간절하고 절실하게 말했다. 조정에 나가서는 마치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이 굴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황상이 그를 가까이 하였다.

석경이 태복(太僕)이 되었다. 태복은 궁궐의 수레나 말을 관리하는 직책이어서 황제를 모시고 궁궐을 나가는데 황상이 수레를 끄는 말이 몇 마리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석경은 채찍을 들어서 말의 숫자를 다 세고서 손을 들어 말하였다. ‘여섯 마리이옵니다.’

석경은 만석군의 여러 아들 가운데서도 가장 간단히 말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시대에도 이런 사람은 있게 마련이지만 쓰는 사람의 안목이 어떠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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