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죽음을 준비한 한나라의 문제(文帝)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棺)두껑을 닫은 후에 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을 평가하려고 할 때에 권위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에 아부하는 평가가 있거나 시기하는 평가가 따를 수 있어서 올바른 평가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죽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하늘은 공평한 것이고, 죽은 다음에 평가하는 것이니, 이 또한 역사적으로 공평한 것이라 할 것이다. 내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역사에 기록해 놓기 때문에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자치통감 권15에는 전한시대의 훌륭한 임금으로 알려진 문제(文帝)가 죽은 사실이 실려 있다. 문제는 후 7년(기원전 157년) 여름 6월 초하루에 미앙궁에서 죽었는데, 죽기 전에 유언이 담긴 조서를 남겼다.
“짐(朕)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대개 천하 만물이 싹이 터서 자라면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는다는 것은 천지의 이치이며 만물의 자연스러움이니 어찌 슬퍼할만한 것인가? 지금 시대에는 무두가 사는 것만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면서 장례를 후하게 치르느라 생업까지 중단하며 복상(服喪)을 무겁게 하여 사람을 다치게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
이것이 문제의 유명한 단상론(短喪論)의 앞에 나오는 글이다. 문제는 자기가 죽은 다음에 그동안 시행하여 온 상례절차를 대폭 간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관(下棺)을 하고서는 대공(大功)은 15일, 소공(小功)은 14일만 상복(喪服)을 입고, 시마(緦麻)는 7일 뒤에 상복을 벗으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후대에 유가(儒家)들에게 많은 토론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스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자기가 죽은 다음에 받을 수 있는 대접을 대폭 줄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역사가는 무엇이라고 썼을까? 역사가의 평가를 보자;
“문제는 즉위한 뒤 23년 동안 궁실(宮室), 원유(苑囿), 거기(車騎), 복어(服御)를 조금도 늘리지 않았다. 불편을 줄만 한 것이 있으면 바로 풀어버려서 백성들을 이롭게 하였다. 일찍이 노대(露臺)라는 놀이터를 하나 만들려고 하여 장인(匠人)을 불러서 견적을 내게 하였다. 장인(匠人)은 100금(金)이 든다고 보고하자 황상인 문제는 말하였다. 100금이라면 보통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 열 집의 재산이다. 내가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궁실을 받들면서 살면서도 늘 이를 황송하고 부끄러워하였는데, 어찌 노대를 만들겠는가라고.
또한 항상 검은 색의 거친 옷감으로 된 옷을 입었고 그가 마음으로 아끼던 신부인의 옷도 땅에 끌리지 않게 하였다. 휘장에 수를 놓는 일이 없었으니 질박한 모습을 천하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주었다. 그의 무덤인 패릉을 만들 때에도 질그릇 제품을 사용하고, 금, 은, 동, 주석으로 장식하지 않게 하였다. 또한 능묘는 그 산이 원래 생긴 모양대로 만들고 봉분을 더 크게 만들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오왕(吳王)이 병을 핑계 삼아 조회에 나오지 않자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여러 신하들 가운데 원앙이라는 사람이 간(諫)하는 말은 유독 칼로 자르듯 심하였으나 그럼에도 황상은 이를 받아 들였다. 장무라는 사람은 금전을 뇌물로 받았다가 발각이 되었는데 더욱 상을 내려서 그 마음을 부끄럽게 하는 등 오직 덕(德)으로 백성들을 교화하기에 힘썼다.
이리하여 천하가 안녕하였고, 집집이 풍족하며 사람마다 만족하여 후세에 그를 따라 잡을 사람이 드물었다.”
문제가 죽은 다음에 후세의 역사가가 그를 평가한 대목이다.
사람이 죽은 뒤의 평가를 두려워하며 산다면 아마도 모두 문제(文帝)와 같이 살 것이다. 정말로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너와 내가 아는 것인데, 숨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는가? 역사에서는 나와 너의 모든 것을 기록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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