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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도(道)를 잃지 않은 유비(劉備)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삼국지 이야기 가운데 유비는 가장 덕스러운 사람으로 알려 졌다. 사실 우리가 읽는 ‘삼국지연의’는 주자학의 입장에서 혈통주의를 내세워서 유비를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유비는 이리저리 쫓겨 다니었으니, 세력은 보잘 것 없었다. 그에게는 조조처럼 중앙정부를 움켜쥐고 황제를 조정하는 힘도 없었고, 손권처럼 강남지방의 토호도 아니었다. 유비보다 세력이 큰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촉(蜀)으로 들어가서 위(魏) · 오(吳)와 더불어 맞서는 세력이 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제갈량과 관우 장비의 도움이 있었지만 사실 이들을 얻게 된 것도 그의 덕(德) 때문이었다.
그가 덕스러웠던 한 가지 사건을 보자. 건안 13년(서기208년)의 일이었다. 유비는 형주에 근거를 둔 유표에게 붙어 있었는데, 유표가 죽자 그의 아들 유종(劉琮)이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고, 유비가 조조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설혹 조조를 막을 수 있다고 하여도 만약에 유비가 조조를 막는다고 하여도 자기 밑에 있을 것 같지 않자 모든 것을 들어서 조조에게 귀부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한밥 먹는 유비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결정하였다.
유비가 낌새가 이상하여 유종에게 물으니 유종은 그의 부하인 송충(宋忠)을 보내어서 전후 사정을 전하였다. 유비는 깜짝 놀라서 송충에게 말하였다. ‘여러 사람이 이처럼 일을 만들고도 아무 말 하지 않다가 조조가 내려오는 화(禍)가 임박하여 겨우 이 사실을 알리니 너무 심하다. 지금 네 목을 베어도 분함을 풀기에 부족하지만 이별하면서 죽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니 안 죽이겠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불러서 대책을 논의 하였다. 어떤 사람은 유종이 있는 형주를 공격하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비는 이를 반대하였다. ‘유종의 아버지 유표가 그 아들을 내게 부탁하였는데, 신의(信義)를 등지고 나만 살자고 할 수 없다.’
유비는 그곳을 떠나면서 유표의 묘에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인사를 하였다. 형주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유비를 따라 나섰다. 그리하여 당양(當陽)에 도착할 즈음에는 좇는 무리가 10만이 되었다. 군사가 10만이 아니다. 남녀노소 민간인 들이었다. 이들은 피난 보따리를 짊어지고 따라오니 하루에 10리를 가기도 힘들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빨리 가서 강릉을 지켜야 하는데, 이 많은 백성을 데리고는 조조의 추격군에게 붙잡힙니다.’ 유비가 대답하였다. ‘큰일을 잘 넘기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들이 모두 나에게 귀부하였는데, 어떻게 차마 버리고 가야겠는가?’
물론 다음에 조조의 기병이 뒤쫓아 와서 유비는 패전을 하게 된다. 어찌 보면 패하지 않을 일을 패한 셈이며, 패할 줄 알면서도 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유비는 여기에서 패하였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것이 훗날 아무런 토대도 없는 그가 조조와 맞서는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을 유명한 역사가 습착치(習鑿齒)는 다음과 같이 평가 하였다. ‘ 유현덕(유비)은 비록 좌절하고 험난하나 신의에는 더욱 밝았으니, 형세가 긴급하고 일이 위태로워도 말을 하면서 도(道)를 잃지 않았다. 유경승(유표)의 옛날 은혜를 추념하니 삼군(三軍)을 인정(人情)으로 감동시켰고, 대의(大義)를 따르는 선비를 사랑하였으니, 기꺼이 실패하려 하였다. 그러나 끝내는 대업을 이룬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은가?’
실패할 줄을 알면서 대의(大義)를 생각하고, 선비를 사랑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그것 때문에 훗날 성공하였다는 말이다. 우리 누가 앞일을  알겠는가? 이 세상을 살고 간 다음에는 역사가가 평가한다. 한때의 이익을 좇았다면 그것도 기록될 것이고, 손해를 볼 줄 알면서도 옳은 일을 한다면 그것도 쓰일 것이다. 역사가 바로 그런 것이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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