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은 이미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황건적(黃巾賊)이라고 불리는 반란이 일어났다. 전후한 400년을 이어온 왕조가 무너지는 시기가 된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영웅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사방에서 명목상으로는 한왕조를 지키기 위하여 도적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래야 군사를 일으키는 명분이 있고, 또 주변으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에 군사를 일으킨 사람들은 누구라도 한왕조의 약화를 이용하여 자기가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먼저 일어 난 것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동탁이었고, 공손찬, 여포, 손책, 원술, 원소, 유표, 손견, 손권, 유비 등이 이름을 낸 사람들이지만 결국 이 난세를 통일해 간 것은 조조(曹操)였다. 그러나 조조도 처음부터 그리 대단한 집안 출신이 아닌 것은 다 아는 대로 이다. 여하간 조조도 이 난세에 군사를 일으켰다. 조조가 황건적을 좇아서 제북(濟北), 지금의 산동성에 이르자 모두가 그에게 항복하였다.
이즘 되면 꽤 성장하였다. 이때에 군사가 30만 명이었고, 그에 딸린 사람들까지 합하면 1백만 명이었다. 정식으로 자기 군대를 선언하였다. 청주(靑州)지역에서 항복한 황건적으로 받아 들였으므로 자기 군대의 이름을 청주병(靑州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이 난세를 살아갈 것인가? 조조에게는 큰 문제였다.
드디어 그는 모개(毛玠)를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삼았다. 정치적인 일을 맡아서 처리하게 하는 직책이었다. 모개는 조조에게 현재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었다. 천하는 나뉘었고, 황제는 이리저리 방랑하며, 백성은 기근 속에 있고, 관부에는 1년 지탱할 여유도 없으며, 백성들은 믿을 곳이 없게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이것을 타개 하는 방법으로 의로울 것, 재물의 뒷받침이 있을 것, 명목뿐이라고 하여도 황제를 등에 업을 것, 군수물자를 마련할 것이었다.
이제 조조는 우선 지금 산동지역에 있으므로 서쪽에 있는 황제와 연관을 맺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장안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하내(河內)를 거쳐야 하지만 그 태수인 장양이 들어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동소(董昭)를 동원하여 장양에게 유세하게 하였다. 유세한 내용은 당시에 가장 강한 원소보다는 조조가 똑똑하다는 것과 장래가 있는 조조와 관계를 맺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조의 사자(使者)는 장안으로 갈 수 있었다.
당시에 중앙에는 이각과 곽사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인물로 말하자면 이각과 곽사란 황실 근처에 있는 바람에 권력을 쥔 것이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욱 멀리 내다보면서 차근차근 자리를 굳혀가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조에 대하여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왜냐 하면 서부에 있는 장안의 입장에서는 조조가 있는 산동지역은 황건적이 드세던 지역이고, 조조도 토벌하였다고 하지만 결국 황건적에 속하였던 무리를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각과 곽사는 조조의 사자를 구류시키려고 하였더니 황문시랑이 종요(鍾繇)가 조조를 칭찬하면서 이들을 설득하였다. ‘지금 보십시오. 다른 사람은 대개가 모두 독자적으로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중앙의 명령을 듣지 않는데, 그래도 조조는 왕실을 마음에 두고 이렇게 사자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믿을 만 하다고 볼 수 있지요.’ 후에 보면 감언이설이었지만 조조는 무사하게 황제를 위한다는 명분만 가지고 중앙에 기댈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한 치의 앞날도 가늠할 수 없는 것이 국제적 분위기이다. 우리에게 앞날을 내다보는 모개나 이를 뒷받침해 주는 종요 같은 인물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우려 때문인가?(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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