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이야기 55회
태학생들의 청류(淸流)운동
후한의 환제는 여오후(蠡吾侯)로 있다가 환관의 도움을 받아서 황제에 오른 사람이다. 이때에 후한에는 태학생이 3만 명이었다. 한(漢)왕조가 서면서 계속하여 유학을 장려한 까닭에 태학생이 이렇게 많이 증가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관직에 오르기를 목표로 한 사람들이었고, 서로 경쟁을 하다 보니까 편을 가르게 되어서 당(黨)이 만들어 졌고 그렇게 되면 행실이 깨끗한지 아닌지를 가지고 서로 흠집을 내기도 하였다.
여남의 태수인 종자(宗資)는 자기의 밑에 인사권을 가진 공조(工曹)에 범방(范淓)을 등용하였고, 남양의 태수인 성진(成搢)은 잠질(岑晊)을 공조로 삼았는데 이들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어서 두 태수는 각각 모든 일을 그들에게 각각 맡겼더니, 군부(郡府)가 아주 맑아졌다. 그리하니 인사권을 가진 범방은 더욱 강경하여 져서 악(惡)한 것이라면 마치 원수처럼 싫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범방의 생질로 이송(李頌)이 있었는데, 평소에 좋은 행실을 보이지 않았지만 황제 곁에서 늘 황제의 시중을 드는 중상시(中常侍)인 당형(唐衡)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자기 외삼촌 범방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여남군 태수 종자에게 부탁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태수인 종자는 이송을 관리로 임명하려 하였는데, 그 밑에 있는 인사권을 쥔 범방이 서류를 묵혀두고 시행하지 아니하였다. 태수인 종자는 화가 나서 범방의 밑에서 실제로 서류를 작성하는 담당자인 주령(朱零)을 불러서 서류를 돌리지 않은 책임을 물어서 채찍질을 하였다.
주령은 채찍질을 받으며 말하였다. ‘공조인 범방이 일을 깨끗하게 처리하였으니, 오늘 차라리 태형을 받아 죽는다 하여도 범방의 뜻을 어길 수 없습니다.’ 태수인 종자도 더 이상 주령을 닦달할 수가 없어서 채찍질을 중지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중상시의 압력은 여남에서 별 호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여남 태수는 범방이고, 남양 사람인 종자는 허락한다고 서명할 뿐이네. 남양 태수는 잠질이고 홍농 사람인 성진은 단지 앉아서 휘파람만 부네.’ 실제로 여남 태수는 종자이고, 홍농태수는 성진인데, 그 밑에서 인사권을 쥔 범방과 잠질이 실제로 태수의 일을 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노래가 불리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관리들에게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깨끗한 일처리를 원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분위기는 태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3만 명의 태학생들은 관리 가운데 부정하고 부패한 사람을 지목하기도 하도 공격하기도 하게 되어 이를 청류(淸流)운동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청류운동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고, 그 핵심은 역시 환관들이었다. 부유한 상인인 장범(張汎)은 후궁과 친척이고, 환관에게 뇌물을 주고 높은 관직을 얻었는데, 잠질과 태수인 성진이 사면령에도 불구하고 붙잡아 죽였다. 또 소황문<환관>인 조진(趙津)은 포악하고 방자하여 골칫거리가 되자 태원태수 유질은 사면령이 내렸지만 잡아서 죽였다.
사면령이 내렸는데도 환관이 법을 어겼다고 하여 잡아 죽이니 억울하게 생각이 들었는지, 중상시인 후람(侯覽)이 죽은 장범의 처에게 사면령이 내렸는데도 자기 남편을 죽였으니 억울하다고 탄원문을 올리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환관들은 태수인 성진과 유질을 기시(棄市)에 처하라고 주문을 올렸다. 이러한 일을 계속되었고, 환관은 태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당을 만들어 정치에 참여한다고 하면서 금고(禁錮)에 내렸다.
청류운동에 맞선 당고(黨錮)라고 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바라 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실례가 될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