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이야기 54회
숨어버리는 은사(隱士)들
그동안 권력을 쥐고 횡포하였던 외척 양기(梁冀)는 황제에게 있어서는 눈의 가시였다. 황제는 자기의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지만 마땅히 대항할 세력을 갖지 못하였다. 황제 주변을 감싸고 있는 상시(常侍)도 대부분 양기의 인물이었다. 환제(桓帝)는 고심 끝에 겨우 환관인 중상시 선초(單超)를 찾아내어 겨우 양기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양씨가 정권을 잡은 지 20년만의 일이었다. 모두가 20년 만에 권력자를 제거한 것에 환호하였다. 환제도 황제로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을 되찾아 준 환관들을 그냥 둘 수는 없어서 선초 등 환관 다섯을 열후(列侯)로 삼았다. 열후란 후작(侯爵)을 준 것이다. 원래는 장군이나 공급관료가 국가에 큰 공훈을 세웠을 때에 주던 작위를 환관에게 준 것이다.
이제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전국에 새로운 인재를 등용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이때 대사농인 황경이 범방(范滂)을 벽소(辟召)하였다. 벽소는 직접 인재를 불러서 일을 시킬 수 있는 제도였다. 범방은 일찍이 청조사라는 관직을 맡은 일이 있는데, 그가 수레에 올라서 고삐를 잡고 비장한 모습으로 천하를 깨끗이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더니 수령 가운데 탐오(貪汚)한 무리들은 소문만 듣고도 인수(印綬)를 풍어 놓고 도망하였고,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시킨 일이 있었다.
새로운 시대에 범방이 다시 등용 된 것이다. 그는 당장 제거해야 할 탐학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다시금 계속하여 실상을 파악하여 깨끗한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농부가 풀을 제거하면 좋은 알곡은 반드시 무성할 것이고, 충신이 간신을 제거하면 왕도(王道)는 청정(淸淨)해 진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희망이 싹 트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상서령인 진번(陳蕃)이 다섯 명을 천거하였다. 서치(徐稚), 강굉(姜肱), 원굉(袁閎), 위저(韋著), 이담(李曇)이었다. 환제는 안거(安車)라는 편안한 수레와 검을 비단을 갖추어 보내면서 예의를 다하여 징소(徵召)하였다. 징소란 어떤 특별한 절차 없이 황제가 인재를 불러 쓸 수 있는 제도였다. 서치는 가난하였지만 겸손하고 공손하였고 의롭고 양보심이 강하여 그가 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인물이다. 강굉을 형제의 우애가 좋아서 형제가 도둑에게 잡혔을 적에 서로 대신하여 죽겠다고 하였던 일이 있고, 원굉은 절개를 지킨 인물이고, 위저는 후학에게 가르치며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이고, 이담은 계모가 심하게 굴었지만 끝까지 잘 모신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황제의 징소에 응(應)하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훌륭한 인물이라고 하여 추대까지 하였건만 한사코 징소를 거절하였으니, 사회적 책임을 다 하지 못하였다고 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제의 정치행각을 보면 이들이 징소에 응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환제는 양기에게 억눌렸을 적에 알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황후의 아버지 등향을 안양후로 책봉하고, 황후의 아빠 등강과 등병은 모두 열후가 되었다. 중상시인 후람이 비단 5천 필을 바치니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양기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다선 환관 후작들은 탐욕스럽게 불법을 저질렀다.
여기저기서 상소문이 올라갔다. ‘지금 하는 일을 한 고조가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이었다. 태위인 황경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고 상소문을 올렸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정치가 보다 나아진 적이 없었고,...., 이고와 두교는 충언(忠言)을 하다가 이미 죽었고...조야(朝野)에 있는 사람들은 충서하기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측근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하는 것이 옛날이나 오늘날 정치의 핵심이다. 천하를 사적(私的)으로 생각하면 인재는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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