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이야기 53회
혼란 중에도 뛰어난 사람은 있다.
후한 환제(桓帝) 때에는 어려운 일이 많았다. 환제 영흥 원년(155년) 7월에 32곳의 군과 봉국에서 황충의 피해가 있었다. 백성들은 주리고 궁색하여서 유랑하고 흩어지는 사람이 수십만 호에 달했는데, 그 가운데 기주(冀州, 하북성 중부)가 더욱 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당시에 시어사였던 주목(朱穆)을 자사로 임명하였다.
주목은 워낙 청렴한 사람이라 그가 부임하려고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 그 관하의 탐관오리들 가운데 미리 인수(印綬)를 풀어 놓고 도망한 사람이 40명이었지만 주목은 부임하자 탐관오리를 찾아내어 탄핵하도록 주청하니, 자살하는 관리가 생겼고, 옥중에서 죽는 사람도 있었다. 마침 황제 측근의 환관인 조충(趙忠)의 고향은 기주부에 속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죽자, 아주 호사스럽고 분수를 넘는 장사를 지냈다. 주목은 이를 조사하게 하자 관리들은 주목의 성품을 아는지라 조충 아버지의 무덤을 파서 호화스러운 관을 파내어 쪼개버렸다.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법을 집행한 주목에 대하여 화를 내고 감옥에 넣었다가 강제 노역장으로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생인 유도(劉陶) 등 수천 명이 대궐에 이르러 편지를 올리며 호소하였다. ‘엎드려 살피건대 형도(刑徒)인 주목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나라를 근심하며 자사로 제수되는 날에 뜻을 세워 간악함을 깨끗이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진실로 상시(常侍)들이 귀함과 총애를 받아서 부자와 형제가 널리 주와 군에 분포되었는데, 서로 다투어 호랑이와 이리같이 힘없는 백성을 삼켰습니다. 이런 까닭에 주목은 천강(天綱)을 펼쳐서 정리하고 새는 틈을 기워서, 해치고 화가 되는 사람을 전부 잡아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환관들은 모두 함께 원한을 품고 미워하였으며, 비방함도 끊이지 않아서 틈새가 만들어졌고, 번져서 결국 형벌을 받아 좌교에 보내져서 노역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계속 주목을 형도로 만든 것은 잘 못이라고 하니, 환제는 주목을 석방하였다. 그 후에 유도 등은 여러 가지 조정의 잘 못을 상소문으로 올렸으나, 황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때에 또 도적떼가 일어나서 청주와 연주와 서주 등 산동지역과 강소성에 창궐하여 피해가 아주 심하였다. 조정에서 해 마다 토벌군을 보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유능한 사람을 뽑자고 하여 한소(韓韶)를 뽑아서 산동지역에 있는 영현(嬴縣)의 현장으로 삼았다. 도적들은 한소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백성들이 영현 근처로 몰려들었다. 먹을 것이 문제였다. 한소는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였더니, 이 업무를 맡은 사람은 안 된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 창고의 소용을 규정해 놓은 것과 다르게 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소는 말하였다. ‘현장이란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니, 이것 때문에 엎어져 죄를 얻게 된다면 웃음을 머금으면서 땅 속에 들어가리라.’ 소소한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대국적으로 백성을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고, 소소한 규정에 의하여 죽게 되더라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그의 상전인 태수도 한소가 원래 명성과 품덕을 지녀서 작은 규정으로 한소를 얽어매지 않았다. 이때에 산동지역에는 한소와 같은 사람으로 순숙(荀淑), 종호(鐘皓), 진식(陳寔)이 있어서 이들을 ‘영천의 네 현장’이라고 칭송하였다.
환제 시기는 후한이 상시(常侍)들 때문에 기울어지는 시기였고, 50여년 뒷면 나라가 3국으로 분열하는 단초가 만들어 지는 시기다. 부패와 권력남용이 횡행하고 도적이 들끓었다. 그래도 몇몇 관리는 자기의 일을 제대로 하였고, 도적들도 그 지역에는 범접을 하지 않았다. 공적인 일 하는 사람이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서 한다면 겉으로 무엇이라 하든지 간신이다. 이 시대에는 특히 간신이 많은 것일까? 아니면 간신을 가려내는 안목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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