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이야기 50
그럴 듯한 논리로 환관 편에 선 황제
권력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많은 사람이 말을 한다. 하나같이 나라를 위하고, 황실을 위하여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그럴 듯한 논리를 세워서 건의한다.
후한 안제(安帝)는 장제(章帝)의 손자이지만 그의 4촌 상제(殤帝)가 후손을 두지 못하고 일직 죽는 바람에 황제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니까 황제에 오르지 못한 그의 아버지 유경(劉慶)을 높여서 효덕황(孝德皇)이라고 올리고, 환관인 중사(中使) 백영(伯榮)을 자주 효덕황의 원묘(園廟)에 보내었다. 효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환관은 황제의 아버지 무덤을 돌본다는 명분을 가진 것을 기화로 대단히 횡포하였다.
보다 못한 상서복야 진충(陳忠)이 상소문을 올렸다. ‘폐하께서 효덕황의 원묘를 친히 받들 수 없어서 자주 중사를 보내어 감릉에 공경을 드리는데, 주홍색 수레와 나란히 끄는 말들이 서로 도로에서 마주 볼 정도가 되니 효성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안제가 효성스러워 자주 환관들을 보내는데, 얼마나 자주 보내는지 먼저 떠난 환관의 뒷모습을 그 다음 떠난 사람이 볼 수 있을 정도였고, 이것은 효심의 발로라고 일단 칭찬을 하였다.
그러나 그다음은 그 폐해를 지적하였다. ‘신이 듣건대 사자(使者)가 지나는 곳에서 위세와 권력을 크게 부려서 군과 현을 놀래 떨게 한다고 합니다. 왕과 열후 · 이천석 관리가 환관인 백영에게 수레 아래서 절을 하고, 백성을 징발하여 도로를 수리하며, 머물 곳도 수선하니 징발에 한도가 없는데, 움직였다하면 만 명을 동원하고, 뇌물을 주는데, 백영을 따르는 하인에게조차도 수백 필을 주니 가슴을 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결과 ‘백영의 위세는 폐하보다 무겁고 폐하의 칼자루는 신하에게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고, 이 글이 올라갔으나 안제는 살피지도 않았다.
환관인 중상시들이 다른 여러 가지 횡포를 일삼자, 다시 양진(楊震)도 여러 번 간언을 하였지만 황제는 듣지 않았다. 환관들은 자기들을 비난하는 상소문이 올라와 보았자 황제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 이상 꺼릴 것이 없어졌다. 드디어 황제의 조서도 거짓으로 만들고, 한 마을을 몽탕 헐어 버리고 자기 집을 지었다. 양진은 또 간언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조등(趙騰)이라는 사람이 보다 못하여 편지를 올렸더니, 황제는 화가 나서 군주에게 불경죄를 지었다고 기시(棄市)하였다. 양진은 워낙 명유(名儒)여서 그냥 두었지만 이름 없는 조등이야 바로 처형한 것이다.
이쯤 되니, 이 환관들은 후에 태자가 등극하면 그 화가 미칠 것을 겁내어 태자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태자의 유모인 왕남(王男)과 주방을 관리하는 병길(邴吉)도 참소하여 죽이고, 그 가족들을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 다시 허무맹랑한 일을 망령되게 만들어서 태자와 동궁의 관원들을 얽어서 참소하였다. 그리고 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을 논의하게 하였다. 태복인 내력(來歷)과 태상인 환언(桓焉) 그리고 정위인 장호(張浩)가 건의하였다. ‘태자가 아직 어리니 잘 가르쳐야지 폐위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라고.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드디어 폐위되었다. 이에 아주 여러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서 태자에게 과실이 없음을 증명하였지만 황제는 중상시를 시켜서 신하들을 위협하면서 말하였다. ‘부자(父子)가 한 몸이지만 대의(大義)를 위하여 아버지로서의 은정(恩情)을 잘라낸 것이다. 그리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충직(忠直)한 척 하지만 훗날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황제의 말대로 효도(孝道)와 대의를 위하여 은정을 자르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태자에게 잘 보려고 하는 신하들 물리치는 것도 그 말 자체로서는 빈틈없이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것을 거꾸로 본 것이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그동안 역대 정권에서 추진한 정책에서 논리가 모자라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논리로 말잔치만 하는 정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물을 거꾸로 보는 성정이 없었던 것이 원인이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포장을 내세우지 말고 실속을 차렸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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