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나라 때에 흉노는 큰 문제여서 때로는 군사로 공격하였지만 때로는 공주를 시집보내어 화친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진(晉)나라 때에 이르러서 흉노 세력은 때로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중원에 있는 왕조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은 남흉노였다.
사실 이들 남흉노들은 그들은 중원의 왕조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중원(中原)의 문화를 흡수하고 있었는데, 삼국시대에 위(魏) 나라 사람들은 남흉노의 5부에 사는 사람들을 병주(幷州, 산서성 일대)의 여러 군에서 그들의 백성들과 섞여 살게 하였다. 그러자 이들 남흉노들은 예전에 한(漢) 왕조의 공주가 흉노에 시집 왔으므로 자기들은 그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유씨 집안은 자기들의 외가라고 하면서 성(姓)조차도 그들이 본래 성인 난제(欒提)를 한왕조 황실의 성인 유(劉)로 바꾸었다.
하여간 이때에 남흉노의 좌현왕인 유표가 죽자 그의 아들인 유연(劉淵)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흉노의 좌현왕이란 중원지역과 인접한 흉노지역의 책임자이다. 이 좌현왕이 된 유연은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특이하였는데, 상당(上黨, 산서성 長治市) 사람인 최유(崔游)를 모시고 중원지역의 학문인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라를 지키고 유지하는 데는 무예도 중요하다고 하여 무예 공부도 하였는데, 장성하자 원숭이처럼 긴팔로 활을 잘 쏘았으며, 힘이 세서 보통사람을 뛰어넘었고, 자태와 모습이 두드러지게 컸다. 문무를 겸비한 것이다.
중원에서 진(晉)왕조가 들어섰을 때에는 망하였을 때에 유연은 인질이 되어 낙양에 가 있었는데, 유연의 문무 재주가 드러나자 진의 황제와 여러 차례 만나기도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유연의 재주를 보고 그에게 벼슬을 주어 삼국에서 하나 남은 오(吳)를 정벌하게 하고, 또 흉노문제를 해결하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물론 유연이 흉노족이기 때문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 토론 끝에 결국 진 문제 태강 10년(289년)에 조서를 내려서 유연(劉淵)을 흉노북부도위로 삼았다. 흉노북부도위란 흉노의 북부지역을 전체적으로 다스리는 관직인 것이다. 공식적으로 흉노족으로 진(晉)의 관직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2년 뒤에는 건위(建威)장군·흉노오부대도독(匈奴五部大都督)으로 삼았다.
그런데 유연은 재물을 가볍게 생각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마음을 기울이며 물건을 가지고 접대하였으므로 많은 호걸들과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이름 난 유사(儒士)들이 대부분 그에게 가서 귀부하였다. 이렇게 세력을 모으자 유연은 딴 소리를 하였다. 우리 흉노는 한왕실의 외가이고 그래서 성도 유(劉)라고 바꾸었다. 그런데 우리 외가를 조씨(曹氏)의 위(魏)가 망쳐 놓더니 다시 사마씨(司馬氏)가 그 뒤를 이어 받았다. 이제 우리 외가인 유씨의 나라를 다시 일으킬 사람이 중원에는 없다. 나 유연이라도 우리 외가 한(漢)을 부흥시키겠다.
사실 이때에 진(晉)에서는 사마씨들이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자고나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8왕의 난이다. 그리고 황후 가남풍(賈南風)이 전횡을 하여 대외문제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중원에 와 있던 유연은 이 실정을 잘 안 것이다. 그리고 명분을 만든 것이다. 드디어 유연은 나라를 세우고 외가를 부흥시킨다는 명분에 걸맞게 국호를 한(漢, 후에는 전조로 바뀜)이라고 하였다. 이 유연이 세운 나라에 의하여 진(晉)의 회제와 민제는 잡혀 죽고 진은 남쪽으로 쫓겨나서 동진(東晉)이 된다.
유연이 나라를 세운 명분은 정당한가? 아닌가? 세상사에서 명분이나 정의 같은 것들을 내세우면서 자기의 행동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의와 명분이 실력이나 힘을 갖고 있지 않다면 실현될 수 없다. 힘이 있으면 정의와 명분은 만들어 갈 수도 있다. 힘이 있는지 없는지 자기를 돌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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