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촉한의 제갈량과 맞섰던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는 결국 위나라에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 손자인 사마염(司馬炎) 때에 와서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서 진(晉) 왕조를 열었다. 이 사람이 진(晉)의 무제인데, 그때까지 남아 있던 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였던 오(吳)를 항복시켜서 삼국을 통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마염은 촉한이 서기 263년에 위나라에 항복하고 나서 2년이 지난 265년에 즉위하였고, 그 다음해에 오를 멸망시켰으니 실제로 삼국을 통일한 주역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후한이 망한 220년에 위에 선양한 다음에 45년간의 삼국분열시대를 마감한 황제였다. 그 후 25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진(晉)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니 대단히 훌륭한 황제였다. 그런데 그가 서기 290년에 죽었다.
사마염이 죽고 나서의 평가는 흉금이 넓고 밝고 통달했으며 모의하기를 좋아하였고, 직언하는 사람을 받아들였으며, 일찍이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 것이었고, 사실 이러한 평가는 과장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진왕조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의 며느리인 가후(賈后)가 황후가 되어 정치를 전횡하는가 하면 이를 계기로 다음 해에는 바로 ‘8왕의 난’이라고 불리는 사마씨들 간에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10년 뒤에는 가후를 폐위시켜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북방의 오호가 남하하여 왕조를 건설하였고, 중원에 있던 진(晉)은 석륵에게 멸망하고 강남지역에서 진을 재건하여 동진이 세워지지만 이 이후로 중원지역은 오호들의 왕조들이 세워져서 오호16국 시대가 된다. 말하자면 사마염이 죽은 지 30년이 안 되는 시점에 벌어진 일인 것이다.
이러한 혼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 있으나, 이미 죽은 사마염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사마염은 며느리 가씨를 잘 못 들여왔다. 가씨는 사마염의 아들이며 태자인 사마충의 정처인데, 사마염은 진왕조를 세우는데 공로를 세운 가충의 딸이어서 며느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가비가 태자비였을 때에 이미 문제가 있었다. 질투심이 심하여 사람을 죽였다. 또 회임한 시첩(侍妾)에게 창을 던져서 배 속에 든 아이가 칼날에 맞아서 죽는 일이 있었다.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이때에 사마염은 며느리 가시를 폐위시키려고 하였으나, 그 아버지의 공로를 생각하여 그대로 두었다. 또 사마염의 처인 황후가 며느리 가씨에게 자주 훈계를 하였는데, 그것이 쫓겨날 수도 있는 며느리가 쫓겨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가후는 그것을 시어머니가 시아버지 사마염에게 자기를 나쁘게 말하여 얽어매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마염은 잘 못 들어온 며느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일단 시아버지인 사마염이 죽자 가비는 남편 사마충이 황제가 되어서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그 위에 남편인 사마충은 무능하였으므로 가후는 정치권력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시어머니인 황태후를 구박하였고, 급기야는 폐위시켜서 금용성에 유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가후의 친정 사람들은 권력을 잡아갔다.
사실 사마염은 뒤를 이은 혜제 사마충은 무능하여 황제의 업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한 사람이 있었지만 무제 사마염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처이면 며느리인 가씨를 폐출하는 일도 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는 진왕조의 쇠퇴였고, 혼란이었으며, 또 오호가 중원으로 내려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사마염에 대한 평가는 관대했고, 다른 사람과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다고 하여 훌륭하였다고 하였지만 어쩌면 이러한 그의 성격이 그의 뒤에 혼란을 가져온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냥 잘 못을 덮어주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얼굴 붉힐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사마염은 이점에서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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