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후반의 일이다. 사마씨의 진(晉)이 중원지역을 통일한지 20년쯤 지난 시점인데, 북방족 가운데 동부에 자리한 선비족인 모용(慕容)씨들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다시 20여년이 지나면 북방의 이른 바 오호(五胡)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晉)은 동진(東晉)이 된다.
그러니까 진(晉)이 중원을 통일한 후 20년쯤에는 진(晉)의 세력과 북방족 특히 선비(鮮卑)족의 모용씨의 세력이 비등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국제 사회가 양강(兩强) 구도로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는 처신하기가 아주 어렵다. 자칫 잘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선비족의 동쪽으로는 부여(夫餘)가 있었고, 다시 동쪽으로 더 가면 옥저(沃沮)가 있었다.
그런데 선비족이라고 모두 단결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기 285년에 선비족의 우두머리 모용산(慕容刪)이 그 부하들에게 죽으니 그 부중(部衆)들은 모용외(慕容廆)를 영접하여 세웠다. 모용외가 우두머리가 되자 아버지 모용섭귀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같은 선비족인 우문부(宇文部)를 치고자 하여 진(晉)에다 이들을 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진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용외는 화가 나서 요서지역으로 쳐 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진(晉)의 무제 사마염은 지금의 하북성으로 군사를 파견하여 모용외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한번 싸움으로 선비족이 물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매년 진(晉)의 변경을 침범하였고, 다시 그들의 동쪽에 있는 부여(夫餘)를 공격하였다.
모용씨의 침략을 받은 부여에서는 부여왕인 의려(依慮)는 자살하였고, 그의 자제들은 도망하여 그 동쪽에 있는 옥저(沃沮)로 갔다. 모용외는 부여의 도성을 완전히 부수어 버리고 그 백성 1만여 명을 몰아가지고 돌아갔다. 힘을 키우지 않았던 부여의 비극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지 6개월 만에 예전에 부여왕 의려의 아들인 의라(依羅)가 남아 있는 백성들을 인솔하고 원래의 고향인 부여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진(晉)에 요구하였다. 이때에 이 지역을 담당한 진(晉)의 책임자는 동이(東夷)교위 하감(何龕)이었는데, 이 요구를 받아들여서 그의 부하인 독호(獨護) 가침(賈沈)로 하여금 부여 사람들을 호송하여 그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모용외는 그의 장수인 손정(孫丁)을 파견하여 기병을 인솔하고 길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부여사람들을 막아섰다. 이에 독호인 가침이 힘껏 싸워서 손정의 목을 베고 부여국을 회복시켰다. 부여는 외교를 잘한 덕분에 다시 나라를 회복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346년에는 부여는 멸망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부여(夫餘)는 녹산(鹿山, 현토 부근)에 있었는데, 백제(百濟)에게 침략을 받아서 부락이 쇠약해져 흩어졌다가 서쪽으로 가서 연(燕)나라 가까이 옮겼으나 방비를 만들어두지 않았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慕容雋)을 파견하여 모용군(慕容軍)·모용각(慕容恪)·모여근(慕輿根) 세 장군이 1만7천 기병을 인솔하고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 모용준은 중앙에서 지적해주고, 군사는 모두 모용각에게 맡겼는데, 드디어 부여를 뽑아버리고 그의 왕 부여현(夫餘玄)과 부락의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모용황이 부여현을 진군(鎭軍)장군으로 삼고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모용씨에게 한번 나라가 망할 즈음에 처해 있다가 진(晉)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다시 나라를 회복시켰지만 결국은 방비를 두지 않아서 완전히 멸망하고 연에 합병되었다. 예나 오늘이나 강대국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가 나라를 지키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는 사건이라 하겠다. 이웃 강대국이 설혹 도와준다고 하여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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