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의 헌제(獻帝)는 조조(曹操)의 아들인 위왕(魏王) 조비(曹丕)에게 선양을 한 장면이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로 220년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가 연호를 건안(建安)으로 한지 25년째 되는 해 10월 13일 을묘일에 고조묘(高祖廟)에 가서 제사를 지내며, 이제 한(漢)을 위(魏)에 바치겠다고 고(告)하였다. 그리고 장음(張音)을 불러서 임시로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맡게 하여 자기가 갖고 있던 부절(符節)과 인새와 인수와 조책(詔冊)을 받들게 하여 위나라에 황제의 자리를 선양하게 하였다.
후한의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한지 195년만의 일이었다. 헌제도 황제의 자리에 있기로는 30년이었지만 결국 조상들이 물려준 기업(基業)을 조씨(曹氏) 집안에 넘기는 일이었다. 위왕(魏王)인 조비(曹丕)는 그 때까지만 하여도 형식상으로는 헌제의 제후인 위왕이었으므로 편지를 올려서 사양하였다. 사양하는 편지를 계속 3번을 올렸지만 헌제가 사양하는 말을 그대로 믿지도 않았을 것이고,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결국 조비는 황제에 등극하기로 하였다.
번양(繁陽)이라는 곳에다 단(壇)을 만들게 하고 10월 29일에 단에 올라서 인새와 인수를 받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헌제가 선양하는 조책을 내린지 16일만이었다. 그리고 천지에 제사를 드리고 악독(嶽瀆), 즉 산과 내에 제사를 지내는데 교외에서 불을 밝히는 요제(燎祭)를 지냈으며, 연호도 헌제가 사용하던 건안을 고쳐서 황초(黃初)로 하였다. 황초로 한 것은 후한이 오행 가운데 화덕(火德)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상생론(相生論)에 의거하여 토덕(土德)의 상징인 황색(黃色)을 표시한 것이었다.
사실 후한은 화덕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낙양(洛陽)도 낙양(駱陽)으로 고쳐 썼다. 낙양(洛陽)의 낙(洛)이 수(水)변에 쓴 글자이고, 오행의 상극론(相剋論)에 의하면 수극화(水剋火)여서 물이 불을 이기는 것이므로 수(水)변에 쓴 낙(洛)자를 싫어하여 이를 고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수덕에게 멸망할 것을 염려하여 지명을 고쳤다고 하더라도 망한 것이다. 말하기에 따라서는 망한 것을 아니고 보다 훌륭한 제왕에게 선양을 한 것이므로 형식상으로는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양을 하였고, 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선양을 한 것과 같은 이상적인 정치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 위에 조비는 세 번씩이나 사양하는 편지를 올렸으니, 형식상으로는 완벽한 선양의 재현이었다.
아마도 조비가 선양하겠다는 헌제에게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다 동원하여 사양한다는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헌제의 선양을 요순의 선양과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마지못하여, 힘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어서 황제의 자리를 빼앗긴 것이며, 조비도 훌륭하여 선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오히려 보이지 않게 선양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이 형식상 나타나는 것과 그 실질적인 내용이 상반된 경우라고 할 것이다.
세상을 바라볼 때에도 겉으로 나타나는 것과 실제적인 것이 의외로 다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을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고 표현하지만, 요즈음도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우리 사회에는 겉으로는 온갖 말로 훌륭한 내용을 만들고 수식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 반대인 경우가 보도 된다. 고아의 대부라고 알려진 사람이 실은 고아를 미끼로 치부를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이랴! 겉으로는 거룩한 성직자인 사람이 속을 보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다. 또 선거에 출마하면서 온갖 공약을 내세우지만 그것이 사실대로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러다가는 우리 사회에서 표리부동이 능력이라고 잘 못 인식될까 걱정이다.(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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