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晉)의 회제(懷帝)는 흉노족이 세운 한(漢)에 잡혀가서 죽자 사마업(司馬鄴)이 장안에서 진나라의 황제로 등극하였는데 이 사람이 민제(愍帝)이다. 이 민제는 3년 정도 지나면서 흉노족의 한나라 유요(劉曜)에게 투항하는데, 이로써 서진(西晉)은 멸망한다. 그리고 사마예(司馬睿)가 지금의 남경인 건강(建康)에서 진을 부흥시키어 황제에 올라 동진(東晉)을 세운다.
이렇게 서진이 망하고 동진이 서는 과정에서 진(晉)의 유주(幽州)와 기주(冀州) 지역의 군사적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으로 왕준(王濬)이 있었다. 유주와 기주는 지금의 산동지역이므로 서쪽에 있는 진나라의 도읍인 장안은 위협 받는다고 하여도 서쪽은 튼튼한 셈이었다. 왕준은 진나라에서는 이름나 있는 장수였다. 진나라가 촉한을 멸망시키고 강남지역에 있는 오(吳)나라를 정벌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이다. 이때에 왕준은 장강 상류에 4층으로 된 누각 같은 커다란 배를 만들었는데, 배가 하도 커서 배 안에서 말을 타야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만약에 왕준만 동부에서 잘 버텨 준다면 진(晉) 나라는 북방민족이 내려온다고 하여도 황하지역을 다 내주고 남쪽으로 옹색하게 내려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또 그만한 힘이 있었다. 이 시절에 한(漢)의 장수로 진의 왕준과 맞서고 있는 사람은 후에 후조(後趙)를 세우게 되는 석륵(石勒)이었다.
진의 민제 건흥 2년(314년)에 왕준의 사자(使者)가 석륵의 군영으로 갔다. 석륵을 세력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석륵은 힘센 병졸과 무기와 갑옷은 다 숨겨 두고 노약자인 병사와 텅 빈 창고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왕준이 보낸 편지를 받자 절까지 하였다. 그리고 왕준이 보낸 선물인 주미(麈尾)를 받자 이를 감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처럼 하면서 벽에다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이 주미에게 절을 하였다. 주미란 사슴의 일종인 주(麈)의 꼬리를 이용하여 여기에 보석을 달아서 만든 부채이다.
석륵은 왕준을 극진히 공경하는 모양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감이 왕공(王公, 왕준을 높여 부른 말)을 직접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왕공이 보내 준 이 주미를 보니 마치 왕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최고의 공경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왕준에게 편지를 보내어 황제에 오르라고 까지 꼬드겼다.
그러나 석륵은 면밀하게 왕준의 정치를 살폈다. 왕준이 곡식 100곡(斛)을 쌓아 놓고도 가난한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지 않는다는 것과 부역을 많이 시키고 충성스럽고 똑똑한 사람이 자꾸 왕준에게서 떠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왕준이 곧 망할 것을 알았지만 자기 혼자만은 자신만만하고 높은 누각을 세우고 스스로 대단한 업적을 쌓았다고 생각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한편 왕준이 석륵에게 보낸 사자가 왕준에게 돌아와서 보고 하였다. ‘석륵의 형세는 적고, 왕준에 대하여서도 배반할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석륵의 진영에 가서 겉모습만 보고 온 것이다. 이 보고를 들은 왕준은 더 이상 석륵을 경계하지 않았다. 방어 설비도 하지 않고 더욱 교만하고 게을러졌다.
한편 석륵은 엄하게 준비하고 왕릉을 습격하려고 하였지만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석륵이 왕준을 치러 가서 근거지를 비워 놓는다면 그 틈에 뒤에서 다른 종족인 선비족이나 오환족이 노릴 것을 걱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하인 장빈이 속전속결하면 된다는 계책을 내어 실행했다. 결국 왕준은 석륵의 기습을 만나자 자살하려고 했지만 그도 못하고 잡혀 죽었고, 그를 따르던 군대 1만 명도 죽었다.
석륵은 왕준 휘하에 있던 똑똑한 사람을 다 받아들였다. 그리고 ‘유주를 빼앗을 것 보다 이 사람을 얻은 것이 더 기쁘다’고 말하였다. 석륵은 흉노족도 아니고 갈족(羯族)이어서 처음에는 사환(師懽)이라는 사람의 노예로 출발한 사람이다. 그러나 석륵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알았다. 그래서 후조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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