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前秦)의 부견이 동진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후에 북조에서 새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북위의 탁발규(拓跋珪)다. 그는 힘을 길러 북위와 후연 사이에 있는 중산(中山)을 공격하여 자기의 영역으로 넓히고 북위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서 탁발규가 중산(中山, 하북성 정주시)에서부터 남쪽으로 순행하여 고읍(高邑, 하북성 백향현 북쪽)에 이르러 전에 북조를 통일하였던 전진의 좌승상이었던 왕영(王永)의 아들 왕헌(王憲)을 만나서 기뻐하였다. 청주의 중정(中正)으로 삼고 아울러 조정의 행정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여 그에게 인재를 뽑는 일을 맡긴 것이다.
또 북조를 통일하는데 아주 중요한 중원의 중앙지점인 업(鄴, 하북성 임장현 서남 업진)에 이르러 원정과 토벌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한 중앙관청의 지방출장소인 행대(行臺)를 설치하고, 용양장군 화발(和跋)을 상서로 삼아 좌승 가이(賈彝)와 더불어 관리와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업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었다. 그는 업성(鄴城, 하북성 임장현 서남 업진)에서부터 중산을 돌아서 북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병졸 1만 명을 징발하여 곧 직도(直道)를 닦았는데, 망도(望都, 하북성 망도현 서북쪽)에서부터 항령(恒嶺, 하북성 곡양현 북쪽 항산)을 뚫어 대군(代郡, 하북성 위현)까지 이르는 500여 리였다. 북조를 통일하기 위한 고속도로까지 닦았다.
다시 산동(山東, 태행산 동쪽)에서 변란이 있을 것을 걱정하여 다시 정복한 중산에 행대를 설치하고 탁발의(拓跋儀)에게 명령하여 이곳을 진수하도록 하고, 무군(撫軍)대장군 탁발준(拓跋遵)을 상서좌복야로 삼아 발해(勃海, 하북성 중피현)의 합구(合口, 하북성 창주시 서쪽)에서 진수하도록 하였다. 자기가 정벌한 땅의 안정적 지배를 위한 조치였다.
또 그는 중산을 출발하며, 산동(山東) 지역에 있는 6주(州)의 관리와 백성 그리고 여러 이족(夷族)들 10여만 명을 옮겨서 대군(代郡, 하북성 위현)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이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농사짓는데 필요한 소와 전토를 나누어 주었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짓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이들을 편안히 정착하게 하여 안정시키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노동력에 의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탁발규의 이러한 조치는 대단한 것이다. 인재 뽑는 일, 영토를 지키는 일, 행정조치를 하는 일, 경제적 조치와 안정화 정책에서 그의 조치는 조그만 빈틈도 없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력과 안목이 앞으로 갈가리 흩어진 북조를 통일하는 기초를 닦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업적은 북위의 입장에서 보면 영원히 기억될 기초를 닦은 것이다.
이런 다음에 기분이 좋아서 여러 사람과 같이 사냥하다가 곰이 여러 마리의 새끼를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모습을 본 탁발규는 관군(冠軍)장군 우율제(于栗磾)에게 말하였다. “경은 용감하고 굳세기로 이름이 났는데 이들을 때려잡을 수 있겠소?”우율제는 용감하니까 곰을 맨 손으로 때려잡아 보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그러나 우율제는 대답하였다. “짐승은 천하고 사람은 귀한데 만약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어찌 한 장사를 헛되이 죽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귀하게 써야 될 사람을 하찮은 짐승 때려잡는 일에 몰아넣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결국 그 곰을 몰아서 모두 활로 쏘아 잡게 하였다. 탁발규는 이내 자기의 잘못을 알아채고 곧바로 우율제에게 사과하였다.
잘 못한 것을 알아도 부하에게 사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사람도 그러한데 하물며 성공한 황제가 농담처럼 한 이야기에 정색을 하고 반박한 우율제에게 서운한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지만 자기가 잘못한 이상 사과하는 것이 마땅하다. 보통사람도 그러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황제가 사과를 한 것이다. 역시 대성할 인물의 크기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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