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시절에 북조를 처음으로 통일한 사람은 전진(前秦)의 부견이다. 난마같이 얽혀 있던 북조에서 이특의 성(成)을 멸망시킨 전진은 부견시절에 와서 전연(前燕)과 전량(前涼)을 정북하여 통일을 이룬 것이다. 북조가 4분5열 된 지 60~ 70년 만에 큰일을 이룬 것이다.
부견이 통일하고서 이제 북조 전 지역을 어떻게 통치할 것이냐를 고심하다가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은 친척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4촌 동생인 부중(苻重)을 진북(鎭北)대장군으로 삼아서 계(薊)에서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계는 지금의 북경지역으로 새로이 정복한 지역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부중을 크게 신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중의 동생으로 부락(苻洛)이 있었는데, 그는 부견을 도와서 지금의 내몽골지역인 대국(代國)을 정벌하면서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이때 부락은 정북(征北)대장군으로 유주(幽州)자사를 맡고 있었다. 그러니 부중과 부락 형제가 중국의 동북지역 즉 새로 정복한 지역에 대한 통치를 이들 형제가 맡게 된 셈이다, 그만큼 부견이 이들을 신임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부락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자기가 대국(代國, 내몽고지역)을 정벌한 공로를 세웠으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맡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견은 삼공의 지위를 갖고 독자적으로 관부(官府)를 열 수 있는 이 직책을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높은 벼슬을 요구하는 그를 도리어 익주(益州)로 옮기라고 명령하였다.
정북대장군의 직책을 정남대장군으로 삼고, 유주자사를 익주목으로 삼았으니, 그의 벼슬을 깎은 것은 아니지만, 부락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근거지를 떠나서 서쪽으로 옮기라고 한 것이므로 화가 났다. 아마도 전진왕 부견의 입장에서는 자기 공로를 내세우며 높은 직함을 요구하는 부락과 그의 형 부중을 같은 동북지역에 둔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힘이 세어 달리는 소를 쫓아가서 때려누일 수 있고 활을 쏘아서 쟁기를 뚫을 수 있는 재주를 가진 부락은 대단히 용감하기 까지 한 장군이었다. 성격이 괄괄하고 다혈질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부견의 명령을 받고는 화가 났다. 그는 자기를 동부에서 서부로 옮기는 것은 공로를 세우게 한 다음에 자기를 없애려는 음모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군사를 일으켜서 전진왕 부견에게 대항하기로 하였다. 많은 사람이 반대하였지만 일단 생각을 굳힌 그는 반대하는 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형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켰다. 7만 명이라는 많은 군사를 동원한 것이다. 이 정도의 군대라면 충분히 장안에 있는 부견에게도 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전진왕 부견은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부락을 한편 나무라면서 다른 한편으로 타협을 하려고 하였다. 일으킨 군대를 거두면 부락이 근거로 삼고 있는 유주를 대대로 봉지(封地)로 삼게 한다는 것이다. 부견은 자기가 내린 명령을 취소함과 동시에 하북성과 그 동북지역을 모두 부락에게 준다는 말이었다. 큰 제의를 한 셈이었다.
이 말을 들은 부락은 부견이 뒤가 켕겨서 그런 제의를 한 것으로 보고, 큰 소리를 쳤다. “전진왕 부견이 나와서 항복하면 상공(上公)을 시켜 주겠다.” 자기가 왕이 되고 지금 왕인 부견을 상공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더 이상 말이 안 통하겠다고 판단한 부견은 부중과 부락을 쳤다. 이 과정에서 부중은 죽었고, 부락은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부견은 반란을 일으킨 부락을 사면하고 귀양만 보냈다. 관용을 베푼 것이다. 이러한 관용정책 때문인가 그가 북조를 통일한지 10년이 못 되어 다시 분열되었다.
역사가는 반란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귀양만 보냈으니, 누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래서 반란이 만연하여 나라가 다시 쪼개진 것이라는 것이다. 관용은 좋은 정책이다. 그러나 때로는 관용은 어리석은 짓이 된 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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