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石虎)는 후조의 황제가 된 다음에 큰아들 석선(石宣)을 태자로 세웠는데, 또 다른 아들인 진공(秦公) 석도(石韜)를 총애하였다. 이 때문에 석선과 석도 형제는 서로 시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석도는 아버지의 총애를 믿고 방자한 짓을 많이 하였다. 한번은 대들보가 9장(丈)인 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이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태자 석선은 가서 이 대들보를 잘라 버리고 갔다. 화가 난 석도는 다시 10장(丈)인 대들보를 구해다가 건물을 지었다.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형제는 더 이상 화합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태자 석선은 동생이 자기의 결정에 반발하여 10장의 대들보를 썼다는 말을 듣고, 더욱 화가 나서 양배(楊杯) 등 몇 명에게 만약에 석도를 죽이면 현재 석도가 가지고 있는 땅과 재물을 다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다.
결국 석선은 동생 석도가 연회를 베풀고 불정사(佛精寺)에 자게 된 것을 알고, 그를 죽이기로 하였다. 그래서 밤중에 양배 등에게 불정사로 들어가서 석도를 죽이게 하였다. 이어서 만약에 석도의 장례식에 아버지 석호가 참석한다면 그 때에 아버지마저 죽이고 자기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갈 계획도 세웠다.
황제 석호는 총애하는 아들 석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까지 하였다가 소생하였다. 그리고 석도의 주검이 있는 곳에 나아가서 상례(喪禮)에 참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사공인 이농(李農)이 이를 만류하였다. 석도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경사(京師)에 아직 머물러 있을 수 있으므로 황제가 가볍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석호는 군사를 풀어서 엄하게 경계하고 궁궐 안에 있는 태극전에서 애도(哀悼)하는 의식을 치렀다.
동생 석도를 죽인 태자 석선도 이 상례에 참석하였으나, 곡을 하지도 않고 또 나와서는 ‘하하’하면서 시체를 보고 웃으며 나갔다. 그리고 죽은 석도의 부하인 정정(鄭靖)과 윤무(尹武)를 잡아들여서 이들에게 석도를 죽인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황제인 석호는 석도를 죽인 범인은 태자 석선일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석선을 불러 궁궐로 들어오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석선이 말을 듣지 않고 궁궐로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하여 석선의 어머니 두후(杜后)가 석도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위독하게 되었다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석선은 의심하지 않고 궁궐에 들어왔는데, 황제 석호는 그를 잡아 억류하였다.
조사 끝에 결국 석선이 양배 등을 시켜서 한 짓이 밝혀졌다. 석호는 너무 슬퍼서 석도를 죽였던 칼과 화살에 묻어 있는 석도의 피를 핥으면서 울부짖었다. 이를 본 석호의 스승 스님인 불도징(佛圖澄)이 석호에게 말하였다. 죽은 석도와 죽인 석선은 모두 황제 석호의 아들인데, 지금 다시 석선을 죽인다면 화(禍)가 계속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죄는 정말로 나쁘지만 관용과 자비를 베풀라고 하였다. 그러나 석호는 태자 석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석도가 총애하는 환관들에게 태자 석선의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고 혀를 뽑고, 손발을 자르게 하고 눈을 뽑고 창자를 터뜨려서 석도가 죽은 것처럼 죽였다. 그리고 화형에 처하였다. 뿐만 아니라 석선의 아들들을 다 죽이고, 태자궁에 있던 석선의 호위병까지 다 죽였다. 또 그 생모인 두황후도 폐위시켰고 태자 석선이 살던 동궁(東宮)을 돼지우리로 만들었다. 이렇게 원수 갚듯 하였지만 결국 석호도 병이 났다. 그 해에 석호도 죽고 후조는 그 후 2년을 더 버티지 못하고 멸망한다.
다툼의 출발은 조그만 자존심과 화를 참지 못한데서 나왔다. 상대가 좀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참는 아량이 아버지인 황제 석호, 태자 석선, 그리고 동생 석도에게는 조금도 없었다. 대단하지도 않은 자존심과 고집만 피우자 옆에서 그래도 참으라는 충고를 했지만 그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일시적인 분노로 전체를 망가트린 예였다.
요즈음 우리의 주변에도 이러한 꼴은 많다. 여야의 싸움도, 재벌 형제간의 싸움도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뿐이랴! 보잘 것 없는 소시민의 가정에도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