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西晉)을 이어받아 동진(東晉)이 강남에 근거지를 마련하고서 얼마 안 되어서 중원지역은 크게는 셋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동진이고, 다른 하나는 동진을 곤란하게 한 한(漢)으로 국호를 조(趙)로 바꾸어 전조(前趙)로 불리는 나라였다. 또 다른 하나는 전조에서 독립한 석륵(石勒)이 세운 조(趙)나라다. 이를 보통은 유씨의 전조와 구별하여 후조(後趙)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 왕조를 만든 후조는 아직도 동진(東晉)의 소유인 중원의 동부, 즉 산동지역으로 진출하려고 도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되자 지금의 북경지역인 유주(幽州)와 그 부근에 있는 병주(幷州)와 기주(冀州)를 놓고 동진과 후주가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래서 후주에서는 석호(石虎)가 이 책임을 맡아서 동진의 유주자사인 단필제(單匹磾)를 공격하였다. 이에 단필제는 그의 동생 단문앙(段文鴦)으로 하여금 이를 막게 하였다. 단문앙은 용감하게 잘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에는 타던 말이 기력을 잃고 넘어 졌다. 이를 본 석호가 단문앙에게 말하였다. ‘형, 그 동안 우리는 서로 잘 지냈으니, 구태여 싸울 필요가 있겠소?’ 석호가 유화적인 말을 건넸다. 적장 단문앙을 형이라고 부르면서 싸우지 말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용감하기로 이름 난 단문앙은 소리쳤다. ‘너는 침략하는 도적놈이고, 마땅히 오래 전에 죽였어야 했던 것인데, 내 형님이 나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았던 고로 네가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는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너에게 굴복하지는 않겠다.’ 9년 전에 동진의 요서공인 단질육권이 석륵을 공격하였을 때에 석륵이 동진에 화의를 구한 일이 있다. 이때 단문앙이 화의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석륵을 죽이지 못한 일을 거론하면서 항복을 거절한 것이다.
다시 부러진 칼을 잡고 무려 6시간이나 악전고투하였으나, 결국은 후조의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이제 단필제가 있는 성은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단필제는 어찌 할 수 없이 말을 타고 동진의 조정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안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역시 석호에게 가서 항복하게 되었다.
단필제는 석호를 만나자 단호하게 말하였다. ‘나는 진(晉)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어서 마음속으로 너를 없애려고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지만 그대에게 공경하는 예의를 차릴 수가 없소.’ 항복하러 간 사람이 죽여 달라는 말과 같은 내용이다.
석륵의 공격을 받은 단필제와 단문앙 형제는 원래 한족(漢族)이 아니었지만 동진에서 벼슬을 하면서 동진을 위하여 일하였던 사람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서 같은 한족(漢族)이 아닌 석호에게 항복하는 것은 그대지 이상할 것도 없는 상황인데, 이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나 후조의 왕인 석륵과 석호는 전에 단필제와 형제관계를 맺었던 사이이므로 석호가 일어나서 잡혀온 단필제에게 절을 하였다. 그리고 단필제를 관군(冠軍)장군으로 삼고 단문앙을 좌(左)중랑장으로 삼았다. 물론 단필제가 다스리던 동진의 유주 등 세 개의 주는 후조의 영역이 되었지만 단필제 형제만은 후조에서 좋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 후에 이들은 후조에서 오래도록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사는 동안 석륵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않고, 동진에서 조정에 나갈 때에 입던 조복(朝服)을 착용하였다. 또 동진에서 관직을 받을 때 신표로 받은 부절(符節)을 항상 들고 다녔다.
단필제와 단문앙은 모두 이적(夷狄) 출신이기는 하지만 동진의 황제에게 충성심을 보인 것이다. 당시의 풍토는 이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었다. 이에 비교한다면 이들의 행동은 확실히 특별하였다. 또 잡혀 와서도 동진을 흠모하는 이들에게 높은 관직을 준 후조의 석륵과 석호도 보기 드물게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매 시대마다 그 시대의 풍조는 있다. 그러나 특별한 사람은 그 시대의 풍조에 휩쓸려 행동하지 않는다. 이익만 있고, 의리와 충성 같은 것이 없는 남북조시대에도 이런 풍조와 달리 충성스럽거나, 너그러운 사람이 있었다. 이해관계가 행동의 지침이 된 오늘날에 과연 단필제형제나 석씨 같은 사람이 있을까 살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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