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예는 동진을 세운 사람이다. 사마예가 동진을 세우게 된 것은 사마씨가 세운 서진이 망했기 때문이다. 서진은 사마염이 조씨의 위(魏)를 엎고 세운지 꼭 50년 만에 북방에서 흉노족이 중원으로 내려와서 압박을 받았다. 그리고 진(晉)의 3대 황제인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熾)가 이들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유총(劉聰)에게 죽은 것이다.
사마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장안에서는 사마치의 조카인 사마업(司馬鄴)이 황제에 올랐다. 이 사람이 민제(愍帝)인데, 이 역시 3년 뒤인 건흥 4년(316년)에 한의 유요(劉曜)가 군사를 끌고 관중(關中)지역으로 들어오자 항복하였고, 다시 2년 뒤에 죽자 사마예(司馬睿)가 장강 유역에 있는 건강에서 진(晉)을 재건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진(晉)에서는 여덟 명의 왕이 나타나서 권력을 두고 싸웠던 ‘8왕의 난’이 있었다. 이렇게 싸우는 사이에 북방의 흉노족을 비록 한 여러 종족들이 속속 남하하여 그들의 터전을 빼앗았다. 그래서 역사 이래 줄곧 한족(漢族)의 터전이었던 중원(中原)을 북방족에게 내주고 야만(野蠻)이라고 무시하던 그들에게 쫓겨 내려왔다. 힘없는 자존심이 그들을 지켜주지는 못한 것이다.
민제 사마치는 흉노에 항복하면서 그래도 자기 조상이 세운 왕조인 진(晉)이 명맥을 이어가게 해야 하는 것이 자기의 마지막 임무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에 승상이었으며 낭야왕인 사마예(司馬睿)에게 황제의 업무를 수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두 사람 관계를 보면 사마예는 사마치에게는 재당숙이 된다.
사마치가 실질적으로 진(晉)을 있게 한 사마의(司馬懿)의 둘째 아들 사마소 계통이라면 진의 재건을 부탁받은 사마예는 사마예의 셋째 아들 사마주(司馬伷) 계통이다. 사마소 계통이 먼저 황제의 자리를 갖다가 실패하자 사마주 계통에게 부탁한 셈이다.
이렇게 되어 사마예는 황제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권력을 갖는다고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전임황제는 둘씩이나 잡혀갔고, 왕조의 근거지는 빼앗겼고, 수많은 한족(漢族)들은 피난 보따리를 싸들고 남쪽으로 물밀 듯 내려갔다. 사마예는 강남지역에 있는 건강에다 근거를 마련하였지만 혼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흉노의 남하도 막아야 하고, 재정도 확충해야하며, 물밀 듯 내려오는 피난민들도 살아갈 길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이러한 혼란 시기에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통치철학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해야 할 많은 일 가운데 먼저 할 일을 골라야 한다.
이러한 때에 대막(戴邈)이라는 사람이 건의하였다. ‘상란(喪亂)하게 된 이후로 학교가 허물어지거나 없어졌습니다. 논의하는 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평화의 시대에는 문(文)을 숭상하고, 혼란을 만났을 때는 무(武)를 숭상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그럴듯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혼란한 시대일수록 먼저 문(文)을 교육하여 예의염치를 젊은 사람들에게 알게 하여야 국가의 장래가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대막은 정남(征南)장군부의 군사(軍司)였다. 군사란 군사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직책이므로 무관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군대를 더 길러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예의염치를 교육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사마예는 바로 태학을 세운다. 전쟁으로 무너져간 교육기관을 먼저 재건한 것이다. 당장은 어렵지만 먼 장래에 더 나아 질 것을 바라면서 교육을 통하여 그 미래를 대비하는 철학을 가진 것이다.
대막의 건의를 받아들인 사마예는 서진의 마지막 황제인 사마치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식을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왕조인 동진은 100여년을 더 지탱하였다. 중원지역을 다 갖고도 50년밖에 유지하지 못한 서진에 비한다면 대단하다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교육을 강조한 덕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다. 자녀에게 돈만이 최고라고 가르치는 요즈음 부모들을 보면 비교가 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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