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 송(宋)의 문제 유의륭(劉義隆)은 재임하는 30년 동안 제도를 올바로 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였으며,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부역과 세금을 감면하는 등 나라를 잘 다스린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으로 그 스스로가 세웠던 태자에게 죽임을 당한 비극의 인물이 되었다.
사실 유의륭은 아들만 19명을 두었다. 황제에게 아들이 많다는 것은 잘만 하면 나라를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 왕조시대에 왕족을 번성하게 한다는 것은 왕조를 지켜내는 자산이다. 왕실이 번성하지 못하면 타성이 왕조를 지배하게 되고, 결국 왕조가 망하는 일을 역사에서 흔히 보아왔다. 그러한 점에서 남조 송의 문제 유의륭은 그 자산을 많이 가진 셈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이 아들들을 제대로 기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자식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그 갈등의 원천은 당연히 후계자를 두고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는 장남인 유소(劉劭, 424~453)를 황태자로 삼아서 자기의 뒤를 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원가 6년(429년)에 내렸으니, 유소가 5살 때의 일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책읽기를 좋아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도 좋아하여 장래가 기대되었다. 이것으로 보아서는 그가 후계를 잘 고른 것 같지만 그가 고른 똑똑한 아들 유소는 자라면서 불안해 졌는지도 모른다. 비록 자기가 태자이긴 하지만 많은 다른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드디어 그가 28세가 되는 해에 무당인 엄도육을 만나고, 또 그의 둘째 동생 유준(劉濬)과 뜻이 맞아서 황제인 아버지 유의륭의 조각된 인형을 궁궐에 있는 함장전 앞에 묻는다. 이른 바 무고(巫蠱)라는 것이다. 이는 비방(秘方)으로 아버지를 죽게 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태자 노릇을 23년이나 했는데도 자기가 언제 자리를 이을지 모르고, 또 많은 경쟁자인 동생들이 있는 처지라 자리가 불안해서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결국 탄로가 났고, 황제 유의륭은 엄히 꾸짖었으며, 무당인 엄도육과 관계를 끊게 했지만 유소는 여전히 아버지의 눈을 속이면서 엄도육을 보호했다. 생각해 보면 무당 엄도육의 비방을 절대적으로 믿은 결과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엉뚱한 생각이라고 하겠지만 당시의 문화 수준에서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도 광신(狂信)자가 있는 판이 아닌가?
그러나 유소가 엄도육을 비밀리에 보호한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된 황제 유의륭은 심각하게 후계자를 다시 세울 것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황제 유의륭은 태자 유소(劉劭)를 폐하고 그와 함께 한 유준에게 사형을 내리고자 하여 방법을 왕승작(王僧綽)과 더불어 이를 모의했다. 그리고 태자를 폐위하였던 역사적 고사를 찾아보게도 하였다. 이제 황태자가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 셈이다.
이를 알게 된 유소는 아버지를 시해하고 자기가 황제의 자리에 나가려고 기도했다. 물론 이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성공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충고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생모도 그러했고, 그 주변에도 그런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밤중에 유소는 자기가 거느린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무리인 장초지(張超之)가 밤늦게까지 후사문제를 두고 논의하던 황제를 공격하였다. 황제는 갑작스런 일에 책상을 들어서 장초지의 칼을 막으려 하였지만 헛수고였다. 유의륭이 죽자 유소가 황제에 올랐지만 결국 그의 하극상은 그의 다른 동생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게 패배하여 죽었다. 일장춘몽이었다. 유소는 왜 그랬을까? 잘난 아버지 유의륭이 잘 못 기론 탓이다. 자식 교육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알게 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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