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북조를 통일한 일이 두 번 있다. 하나는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인데, 북조를 다 통일하고 나서 남쪽에 있는 동진(東晉)까지 멸망시켜서 중국 전체를 통일하려고 하다가 비수의 전투라는 유명한 전투에서 실패하여 오히려 북조가 4분5열되게 하였다. 다른 하나는 북위(北魏)였다. 북위는 북조를 통일한 다음에 비교적 오래 갔고, 이것은 따지고 보면 후에 수·당시대를 열게 한 초석을 쌓았다.
이러한 북위의 북조 통일을 옆에서 도운 사람으로 최호(崔浩)가 있다. 그는 한족(漢族) 출신이지만 탁발씨의 북위에 벼슬하면서 도무제, 명원제, 태무제 등 세 황제를 보필하였다. 그리고 그의 건의가 대체적으로 성공하여 스스로 한나라 때에 유방을 도왔던 장량(張良)에다 비교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북위가 북조를 통일하면서 주변의 나라를 격파하는 과정에서 논의를 할 때에 최호가 내세우는 방략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반대였던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북위의 태무제가 유연(柔然)을 공격하려고 준비를 거의 다 마쳤는데, 많은 신하들뿐만 아니라 보(保)태후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해가 기사(己巳)년어서 음(陰)에 해당한다는 것과 하늘의 별자리가 북쪽으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실패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불쾌해진 태무제는 이들과 최호를 불러서 서로 토론하게 하였다. 그러자 최호는 음은 황제가 형벌을 가하는 것이므로 유연이 북위에게 죄를 지었으므로 황제가 형벌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로 이들을 제압했다. 술수를 가지고 국가의 계획을 좌우하는 것이 맞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이들은 다시 북쪽으로 군대를 동원하게 되면 남쪽에 있는 송(宋)이 북쪽으로 자기들의 북위를 치러 올라 올 수 있다는 말로 또 반대 했다. 그러나 최호는 역시 남쪽에 새로 바뀐 송나라에서는 그렇게 재빨리 북쪽으로 올라 올 수 없다고 상황을 설명하였다. 물론 북쪽으로 유연을 정벌하는 일을 성공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태무제는 최호를 아주 가까이 하였다. 또 필요에 따라서 최호의 집을 방문하여 국가적인 일을 자문 받는 일을 하였다. 때로는 태무제가 최호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는데, 어떤 때는 예고 없이 방문하는 바람에 다급하여 최호는 의관을 갖출 수 도 없었고, 거친 음식을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무제는 최호가 대접하는 거친 음식을 반드시 젓가락으로 먹었다. 그런 정도로 최호를 신임하였다.
또 포로로 잡혀 온 쿠차지역의 우두머리에게 최호를 소개하면서“너희들이 보기에 이 사람은 몸이 약하고 가냘프며 유약하여 활시위를 당기거나 창을 잡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사람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바는 무기나 갑옷보다 더 지나치고 있다. 짐은 비록 정벌의 의지는 있었으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앞뒤로 공을 세웠던 것은 모두 이 사람이 가르쳐준 바이다.”라고 했다.
또 북위의 상서에게도 “무릇 국가와 군사에 관한 큰 계책에 너희들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마땅히 최호에게 자문을 구한 연후에 시행하도록 하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 동진이 송으로 바뀜에 따라서 사마씨들이 북위로 많이 왔는데, 이들은 북위의 힘을 빌려 자기들의 원수인 송을 공격하자고 말했을 때에도 최호는 이에 반대했다. 이럴 때만다 최호는 많은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최호의 말이 맞았다. 그래서 북위는 북조를 통일할 수 있었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이다. 모든 문제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서 결정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더 많이 아는 한 사람의 선생 말보다 아직 부족함이 많은 학생 말이 옳다고 하는 세상이 됐다. 그래서 선생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열사람이 주장하더라도 틀릴 경우가 있고, 한 사람이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경우가 있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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