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164 article Join Login
 
<제115화> 기회를 잡는데 강한 유유

삼국을 통일하였던 진(晉)이 북방에서 오호(五胡)가 내려오는 바람에 쫓겨 장강지역으로 가서 다시 세운 진(晉)왕조를 역사에서는 동진이라고 불린다. 그 후 근 300 년간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는 남부인 장강 유역에 머물러 있었고, 그 후로 이 지역에서 왕조가 4번이나 바뀌어 삼국시대에 이 지역에 자리하였던 오와 동진을 합쳐서 여섯 왕조가 남부에 존재했다하여 6조(朝) 시대라고 한다.
이 300년 동안 남조는 항상 북방민족이 세운 북조(北朝)에게 밀리고 있었다. 물론 전진(前秦)이 동진을 완전히 삼키려고 100만 대군을 몰고 내려왔지만 제풀에 꺾여 비수(肥水)의 전투를 계기로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꺼리기는 했지만, 결코 북방으로 쳐 올라가서 고토(故土)를 회복한다는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동진 안에서 권력을 잡은 환현(桓玄)이 결국 독립하여 초(楚)를 세워 황제에 올랐으니, 남부지역에는 동진의 황제 외에 또 한명의 황제가 있게 되었다. 중원지역을 내 놓고 남쪽으로 쫓겨 왔으니 당연히 고토(故土) 회복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처지였는데, 권력을 잡은 사람이 자기의 사욕을 채우려고 한 짓거리였다.
이때에 홀연히 나타난 사람이 후에 남조의 송(宋)을 세운 유유(劉裕)였다. 그는 처음에 북부(北府) 장군인 손무종(孫無終)의 군사참모였다가 손은(孫恩)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재능을 보였고, 후에 환현이 독자적 정권을 수립했을 때에 의병을 일으켜서 환현을 격파하고 동진정권을 구출하였다. 그러므로 유유는 동진의 구세주였지만 그에게도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유가 그냥 동진의 구세주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실부모하여 동냥젖으로 살았으며, 어려서는 짚신을 삼아 팔면서 고생을 하면서 자신을 단련하였었다. 그래서 가난뱅이였었지만 기회가 올 때에 이를 놓치지 않았고, 손은의 반란과 환현의 칭제(稱帝)라는 사건을 계기로 그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를 통하여 유유는 동진에서 중요한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유유는 당시 북조는 4분5열 된 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다져 나갔다. 동진의 바로 위에 있는 연(燕)지역이 후연과 북연, 서연, 남연으로 나뉘었으니, 유유는 남조의 고토수복 의지를 이용하여 좋은 기회로 만들었다.
이 기회를 놓질 수 없었던 유유는 남연을 정벌하자고 했다. 그러나 인순고식한 조정의 인사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였지만 이미 권력을 잡은 유유가 밀어 붙였다. 그리고 자기를 믿고 따르는 좌복야 맹창(孟昶)·거기장군부의 사마 사유(謝裕)·참군 장희(臧熹)를 데리고 가서 남연의 항복을 받아냈다. 남연이 분열 된 것을 기회로 삼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유유만이 상황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동진의 남쪽 끝인 광주(廣州)에 있는 사람들은 원래 이 지역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독립하려 하던 터라 동진의 유유가 북쪽으로 남연을 치러가는 틈을 이용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동진의 도읍인 건강(建康, 남경)을 향해 올라왔다. 사실 이러한 염려 때문에 동진 조정의 많은 대신들은 남연 정벌을 반대했던 것인데, 이것이 그대로 나타났다.
유유로서는 위기를 만난 셈이다. 조정에는 여전히 그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유유는 돌아와서 적은 병력을 가지고 적절한 용기와 전략으로 남부의 강력한 반발 세력을 토벌했다. 이것이 그가 후에 동진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을 건국하게 된 토대였다.
기회는 어려운 가운데 있는 것. 6.25라는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를 이렇게 단련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 가지로 취직이 어렵다고 아우성하는 젊은이들은 이 어려움이 자기를 단련시키는 기회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Prev
  <제116화> 고래 싸움에 낀 새우의 운명

권중달
Next
  <제114화> 모용희의 못난 황후 아끼기

권중달
List


Copyright 1999-2026 Zero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