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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화> 군자 잠승지

남조 양(梁) 무제 대통(大通) 원년(527년)은 양나라에 호기가 닥쳤다. 항상 무력으로  양나라를 괴롭히던 북위에서 내부분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오래도록 호태후가 권력을 잡는 바람에 내부적으로 쿠데타가 자주 일어났었는데 또 분란이 일어났으니 양에게 기회가 된 것이다.
북위에서 유획(劉獲)·정변(鄭辯)이 서화(西華, 하남성 서화현)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기원을 바꾸어 천수(天授)라고 하면서, 양 나라의 잠승지(湛僧智)와 더불어 왕래하며 모의하였으니 양나라의 기회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위 조정에서도 조세표(曹世表)를 동남도행대(東南道行臺)로 삼아 유획 등을 토벌하도록 하였으니 잠승지가 성공하려면 조세표를 맞아야 했다.
그런데 토벌명령을 받은 조세표는 방금 등에 종기를 앓고 난 처지여서 전장에 수레를 타고 나가야 했고 그 위에 당시 북위 군대의 분위기는 전의가 상실되어 지레 질겁하고 흩어지는 상황이었다. 잠승지에게 유리할 것 같았지만 조세표는 전세를 정확히 읽고 반란을 일으킨 유획과 정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잠승지가 가진 군사력도 약하여서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던 데에도 원인이 있다.
자칫 좋을 기회를 놓질 것 같은 잠승지는 다시 북위의 동예주(東豫州) 자사 원경화(元慶和)를 광릉(廣陵, 하남성 식현)에서 포위하였다. 이번에는 양나라 잠승지의 군사가 우위를 점하였다. 그런데 북위에서도 장군 원현백(元顯伯)을 보내어 원경화를 구원하니, 잠승지는 또 열세에 몰리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양의 하후기(夏侯夔)가 병사를 이끌고 와서 잠승지를 도와서 원경화를 공격하였다. 결국 양과 북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3개월 만에 원경화가 성을 들어가지고 항복하겠다고 하였다. 고전 끝에 양이 승리의 가닥을 잡은 것이다.
이제 양나라에서는 정식으로 북위의 원경화에게 항복을 받는 절차만 남았다.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였고, 애써 싸운 사람은 그 공로를 차지하면 된다. 그러나 이 전쟁에 기여한 사람은 잠승지와 하후기 두 사람이다. 잠승지는 최초로 위의 원경화를 포위한 사람이고, 하후기는 잠승지를 결정적으로 도운 사람이었다. 그러니 딱히 누가 제일의 전공을 세웠다고 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만약에 두 사람이 서로 원경화의 항복을 받겠다고 한다면 열매를 거두기도 전에 내부가 깨질 수도 있는 판이었다.
그런데 하후기가 이를 잠승지에게 양보하였다. 하후기의 덕스러운 모습이었다. 이 말은 들은 잠승지가 말하였다. “원경화는 공(公)에게 항복하고자 하였지 저 잠승지에게 항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항복을 받으러 지금 가게 되면 반드시 그의 생각에 어그러질 것입니다. 게다가 저 잠승지가 거느리는 사람은 모집에 응한 까마귀 떼 같은 사람들이어서 법으로서 통제할 수가 없지만, 공이 가지고 계신 군대는 원래 엄격하여 반드시 침해하거나 사납게 구는 것이 없을 것이므로 항복을 받고 귀부하는 사람을 받아들여도 그 마땅함을 깊이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하후기가 성에 올라 북위의 깃발을 뽑고 양(梁)의 깃발을 세웠다. 하후기가 원경화의 성을 접수한 것이며 이에 따라 원경화는 항복한 장수로 병사들을 단속해 가지고 나왔는데 남자와 여자 4만여 명을 얻었다. 양나라의 대승인 셈이었다.
이에 대해 역사가 사마광은 논평하였다. “잠승지는 군자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월을 쌓으며 공격하여 전투하였던 고달픔을 잊고 하루아침에 새로 온 장군에게 항복한 병사들을 주었으니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숨기지 않았으며, 공을 세웠으나 거두어들이지 않고 나라의 일을 성공시키었고, 충성을 하면서도 사사로움이 없었으니, 군자라고 이를 만합니다!”아마 잠승지가 전공을 탐하였다면 순조로운 항복절차를 밟기도 어려웠고, 후세에도 어른다운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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