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중소기업 경영전문지인 신용사회에서 건륭황제의 경영전략을 써 달라는 청탁이 왔습니다. 경영은 잘 모른다고 사양했으나 결국은 청탁을 받기로했는데, 그것이 글 같지 않더라구요. 역사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은 오히려 이렇게 써야 한다고 하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그 내용은 2005년 8월호에 특집 첫번째로 올라와 있군요. 그 내용을 올려 봅니다.
중용으로 수성(守成) 전략을 잡은 건륭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부(富)나 권력 등 기득권을 세습하는 것은 나쁘다고 규정하고 이를 타파하는 것이 정의인 것처럼 여겨지는 풍조가 있지만 선조가 남긴 부와 권력을 지키고 더욱 발전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모르는데서 온 생각이다.
올해는 해방 60년을 맞는 해이니, 실험적으로 해방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100대기업에 드는 기업 가운데 오늘날에도 100대 기업 속에 들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하고 조사해 본다면 그 숫자는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아주 적다. 그만큼 수성(守成)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창업(創業)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간혹 물려받은 유산이 적다고 불평하기도 하지만 왕조가 바뀌는 것을 보면 더 없는 위대한 유산인 왕조를 물려받은 황제조차도 그 유산을 지키기가 쉬운 것은 아닌 듯싶다. 제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갖추어 물려받은 사람은 아마도 청(淸)나라의 건륭제(乾隆帝)일 것인데, 여기에서 그의 수성전략을 보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건륭제가 받은 유산은 강희제와 옹정제가 아시아의 동북쪽 끄트머리에 있던 소수민족인 만주족을 이끌고 중원을 통일하고 어느 시대보다 잘 살게 만들었으며, 어느 시대보다 넓은 영토를 만든 70여 년간 천하를 경영했던 토대와 조직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건륭제는 가장 행운의 황제였다고 한다.
25세에 등극한 건륭제가 이처럼 좋은 조건으로 나라를 물려받았다고 하지만, 이것은 겉모양이고 안을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갈등적 요소가 잠복하고 있었다. 건륭황제의 관대한 정책은 귀족들을 부패하게 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엄격한 통치 방법을 썼더니 이번에는 귀족들의 인심을 흩어져 있었다. 또 과거 합격자 동기끼리 결탁하는 것이나 토지를 개간을 장려하였더니 허위보고가 난무하는 것이나, 그리고 몽골의 오이라트부족이나 묘족들의 반란도 반복되었으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한 셈이었다.
새로 황제가 된 건륭제는 쌓인 문제를 해결하고, 더욱 발전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서 어떤 국가경영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을까? 할아버지 강희제의 관대한 정책과 아버지 옹정제의 엄격한 정책은 모두는 그 시대의 필요했을 것이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정책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발표한 천하경영 정책은 그때그때 상황에 알맞게 대처하는 중용의 도(道)였다.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 가운데 중용(中庸)의 도를 찾아내는 것이 귀하다. 관대하다 싶으면 사나움으로 이를 규찰하고, 사납다 싶으면 관대함으로 이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경영하면서 할아버지의 관대함과 아버지의 엄격함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만들어 낸 새로운 방향이었다.
그가 취한 첫 번째 중용정책은 엄격한 제재를 완화하는 조치였다. 그동안 황실 안에는 황족들 사이의 갈등이 심하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서로 배척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나갈 줄 모르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형이 잡혀 들어가면 동생이 좋아하고, 삼촌이 잡혀가면 조카가 즐거워하는’ 정도로 심했으니, 피차간의 싸움은 많은 옥사(獄事)를 일어나게 했다. 이러한 갈등을 풀어 주어야 3억 인구를 먹여 살리고 넓은 영토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차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여 대동단결한 힘으로 국가경영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문관출신으로 지현(知縣)이상의 사람과 무관출신으로 수비(守備)이상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써 먹을 재주를 가진 사람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명령하였다. 과거의 정적(政敵)이었다고 하여도 능력만 있다면 과감하게 풀어 주고 채용하겠다는 이러한 정책으로 많은 인재들이 새롭게 건륭조정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용정책만으로 문제를 풀어 갈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쌓였던 문제를 척결하는 결단도 필요하였는데 그것은 허위보고의 문제였다. 당시에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고, 농업의 발달은 농지의 확대였으므로 정부에서는 농지를 많이 개간하게 한 지방관원들에게는 종종 승진의 기회를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개별 관원가운데는 승진을 위하여, 또는 상사(上司)의 뜻에 영합하려고 농지를 개간했다고 허위보고하고 늘었다고 보고한 토지만큼 늘어난 세금을 농민들에게 덧붙여서 가혹하게 걷어서 바치는 일을 해 왔다. 완벽한 속임수이지만 최고 경영자인 황제는 알 수 없는 일이었고 오히려 이들에게 승진과 상급을 주는 일까지 있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일은 겉으로는 발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속은 곪아 터지는 일을 불러 오는 것이었다. 경영자가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지나간다면 경영을 망칠 것이고, 알고도 관대하게 넘어 간다면 바보에 가까운 것일 터이다.
견륭황제는 허위보고가 있다는 보고서 한 장을 받았다. 하루에도 수백 건의 보고서 가운데 이 하나를 보고 즉시 ‘토지를 개간하였다는 헛된 명목은 실제로 백성들에게 해로움을 누적시켰다.’고 하면서 이를 엄격하게 금지 시켰다. 보통 때와는 전혀 달리 재빠르게 조사시키는 조치를 취하였고, 한 달 만에 하남총독인 왕사준(王士俊)을 파직시킬 만큼 엄격하게 처리하였다. 결과 ‘건륭시대의 돈은 1억년을 가리라.’라는 찬탄이 생겨났으니 건륭황제의 힘을 주었다.
대화합정책을 통하여 인력을 극대화하였고, 사무적인 일에서는 엄격한 조사와 조치를 취하여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건륭제의 천하경영방침은 일한 내용을 보지 않고 사람만을 보는 관행을 깨트린 것이고, 이 경영전략은 성공하여 천하(平天下)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 경영전략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그가 총애하였던 대신(大臣)인 화신(和珅)은 뇌물을 받아 3년분의 국가 수입만큼 개인축재(個人蓄財)를 했다. 그런데도 이를 알아내지 못하였으니 이미 이 거대한 왕조는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가 죽은 지 40여년 뒤에는 끝내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으니 이것도 경영하는 사람이 경계해야 할 일이다.
권중달<중앙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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