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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중달 
Subject  
   자치통감 해제
출판사에서 자치통감의 해제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일반 교양을 위한 세계의 고전 40종 가운데 하나로 '자치통감'을 뽑았다는 것입니다.

제왕을 위한 책 ; 자치통감

1. 통치자와 역사책

청대에 양무운동을 하였던 양계초는《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제왕의 정치교과서’라고 딱 잘라 말한 일이 있다. 자(資)란 ‘밑천이 된다.’는 말이고, 치는 ‘치세(治世)’를 말하며, 통(通)이란 ‘관통한다.’ 혹은 ‘통시대적이다.’ 라는 뜻이며, 감(鑑)은 ‘거울’이므로 ‘비추어 본다.’는 뜻이므로, 《자치통감》은 ‘치세를 이룩하기 위하여 밑천이 되는 통시대적인 거울’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니 양계초의 말은 상당히 근거 있는 말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치세를 이룩해야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저술된 것이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인간이 살아 온 모든 흔적에서 그 자료를 찾아냈고, 이 자료는 결국 교훈<거울>이 되어서 앞으로 치세를 이룩하려는 사람에게 제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결국 치자(治者)를 위한 책인 셈이다.
사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피치자(被治者)이기를 바라면서 태어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피치자임을 자처하지만 그것도 살아남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일 뿐, 본질적으로 피치자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치자가 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그가 갖고 있는 끝도 없는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창안하고 있다. 과학의 발달도 그렇고, 집단생활도 그러하며, 경쟁체제도 마찬가지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이와 같은 초기의 경쟁과정을 거쳐서 만들어 낸 정치체제가 ‘군주독재체제’였다. 이 체제는 기원전 3세기에서 출발한 진․한(秦․漢)시대 이후 청(淸)왕조가 멸망하는 20세기 초까지 2,200년간을 줄곧 유지해 왔다. 그 사이에 물론 분열과 통일의 과정을 거쳤고, 내부적인 변화의 양상을 거치고 또한 수많은 왕조가 부침했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이 체제만은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변화하는 과정을 경험한 인간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고지배자인 제왕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면 이 제왕의 자리를 어떻게 계속적으로 지킬 것인가의 문제로 조금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에 제왕이 되는 길인 창업(創業)하는 방법과 이렇게 만들어진 왕조를 지키는 수성(守成)의 방법을 쉽게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도 간절한 염원이었다.
이 공식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동아시아에서는 과거의 인간들이 살아왔던 모습에서 찾으려 하였다. 인간은 과거이건 현재이건 결국은 경쟁 속에서 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과거에 있었던 여러 경우에 있어서 성공적 대처 방법은 현재에도 유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동아시아에서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였던 책들이 많아진 이유이다.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이 기록의 방법은 시대에 따라서 변하게 마련이고, 《자치통감》도 11세기라는 시대에 보다 유용하게 쓰일 목적으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거의 새로운 방법으로 정리하여 치자에게, 혹은 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제공하였던 책이다.

2. 사반공배(事半功倍)의 《자치통감》

인간이 과거에 경험하였던 것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부딪치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지혜를 제공하고 참고가 된다는 사실을 일찍 터득한 동아시아인들은 쉴 새 없이 경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세계의 어느 지역보다 많은 기록물을 보유하게 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방대한 은대의 갑골문, 주대의 금석문들은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기원전 5-6세기인 공자(孔子)가 살던 춘추시대에 이르면 이미 개인 능력으로 그 많은 유용(有用)한 기록들을 다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당시의 대학자인 공자는 과거에부터 내려오던 기록을 뒤지면서 꼭 필요하고 남겨야할 것만을 골라서 의미(意味)를 주면서 새로이 편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것이 ‘육경(六經)의 산술(刪述)’인 것이다. 시(詩)로 남겨진 것만 가지고 보아도 대략 3,000개를 300으로 줄이는 작업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3천개의 시(詩) 대신에 공자에 의하여 정선된 300편만 읽으면 되었다.
이처럼 과거사를 ‘의미를 가지고 이해하도록 하였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읽는 사람에게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게 한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의미부여에 맹종(盲從)하게 되는 단점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평가의 방법은 그 평가자가 공자(孔子)처럼 중심을 제대로 잡은 사람이 편집한 것이 아니라면 다른 의도로 사람들을 오도(誤導)할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있는 사실에 대하여 사실자체를 객관적으로 기록하자는 생각이 생기고 그 첫 번째의 사람이 사마천(司馬遷)이고 그가 쓴 《사기(史記)》가 동아시아 역사기록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사람을 분류하고 남길만한 사람의 전기를 쓴 것이다. 그 위에 참고적으로 분야별 역사와 연표를 붙인 것이다. 참으로 획기적인 기록의 방법인 것이고 이러한 방법은 대체적으로 청말까지 계승되었고, 황제에 의하여 올바른 역사라는 흠정(欽定)을 받아 ‘이십오사(二十五史)’라는 정사(正史)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정제된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엄청난 분량이 쌓이게 되었다. 이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판단하는데 참고를 제공할 기록이 너무 많아서 없는 것과 같은 지경이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방법으로 기록을 정리할 필요가 생겨야 했다. 마치 춘추시대에 공자가 직면하였던 문제가 재현된 셈이다.
이러한 부분을 잘 표현해 준 것이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완성하고 송(宋)의 신종(神宗)에게 올린 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늘 걱정하던 것은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가 나온 이후로 역사책들이 번거로울 정도로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런 벼슬 없이 포의(布衣)를 입고 사는 선비조차 이 많은 책을 두루 읽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주(人主)께서는 하루에 만 가지의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어느 겨를에 두루 읽겠습니까?’
사실 사마천이《사기》를 편찬한 이후로 송(宋)대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에 이르기까지 1,200년 사이에 정사만을 따져도 이미 17개가 쓰였고 분량은 1,651권이나 되었다. 이렇게 많은 정사는 아무리 그 안에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들어 있다고 하여도 읽을 시간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시렁 위에 올려놓은 묵은 휴지더미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새로이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인 것이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전국시대부터 당말 오대가지 1,362년간(기원전 403년부터 서기 959년까지)의 긴 과정을 거쳐서 총 294권으로 정리하였다. 기록하는 방법도 《사기》등 기전체(紀傳體)를 버리고 연월일별로 기록하는 편년체(編年體)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동안 정리된 정사와 비교하여도 5분의 1이 안되는 분량으로 줄인 것이다. 그럼에도 쓸 내용을 빠뜨리지 않았다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하였다.
인물중심으로 과거를 기록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나타나는 인간들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인간이 펼친 파노라마 같은 역사 사건을 마치 대하소설처럼 읽게 한 것이다. 그 위에 당송(唐宋)시대에 발달한 고문부흥(古文復興)운동과 짝하여 잘 다듬어진 명문장(名文章)으로 쓰인 이 책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3. 《자치통감》을 읽어야 하였던 사람들

중국을 통일하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모택동은 국민당정부의 장개석과 전투를 하면서 대장정이라는 긴 여정(旅程)을 거친 파란만장한 일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한 모택동의 장서(藏書) 속에 이 《자치통감》이 끼어 있고 그것도 17번이나 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모택동은 이미 청소년시절인 호남성립제일중학교 시절에 호여림(胡汝霖)선생님으로부터 이 책을 받아 읽고, ‘상앙(商鞅)이 나무를 옮겨 놓고 신의(信義)를 세움을 논함’이라는 글을 써서 당시의 호남제일중학에서 큰 반응을 일으켰다고도 전해진다. 이 내용은 ‘상앙이 진(秦)나라에 가서 정부가 믿음을 받기 위하여 세길 되는 나무를 남쪽 문에 갖다 놓고 이것을 북쪽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50금(金)을 주었다.’는 《자치통감》 권 2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읽고 이에 대하여 논평한 글이었다.
그 이후로 이 책을 항상 책상머리에 두고 읽었다고 하며 읽으면서 선을 긋고 점을 찍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1956년에는 중국의 고적(古籍)출판사에서는 이 모택동의 표점을 찍을 것을 정리하여 출판하였다. 그는 ‘아주 대단히 훌륭한 책.’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장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읽도록 권고하였다.
사실 이 《자치통감》은 특히 모택동에게만 귀중하게 읽힌 책은 아니다. 역대의 제왕이나 제왕을 보좌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었다. 우선 사마광에게 《자치통감》을 쓰도록 명령하였던 영종(英宗)은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아들인 신종(神宗)은 이 책의 서문을 직접 작성하였다.
이 책은 ‘세상을 잘 다스리어 태평성대를 이룬 군왕들의 사적 속에 그들은 근심하며 아끼는 마음을 가졌으며 충성스럽고 이로운 가르침을 가졌음을 알게 한다.’고 하였다. 또 ‘거칠고 닳고 타락한 짓을 하여 뒤집혀 위험해진 사례를 읽을 때에는 앞에 가는 수레가 실수한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 또한 혼란을 일으킨 도적이나 간사한 사건을 읽을 때면 그 속에 서리를 밟는 것과 같은 계시(啓示)가 있을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식자이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었다. 모든 식자들은 《자치통감》을 통하여 역사를 공부했다. 비록 내용은 중국의 역대 왕조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그 속에서 펼쳐진 인간의 희노애락, 성공과 실패, 음모와 정략, 정의와 불의, 충신과 간신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인간 사회에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인간이 그 수많은 경험을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이 한권의 역사책에서 극복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데 필요한 시간 1-2년을 투자한다는 것은 꽤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누구나 접하고 읽고 싶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역대 지식인은 문자를 터득하고 나면 바로 이 책을 읽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침략을 당하였을 때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청군을 피해 일생동안 산속에 숨어 지내야 했던 왕부지(1619-1692)는 산속에서 이 《자치통감》을 읽고 《독통감론》이라는 역사 평론을 저술하였고, 이를 통하여 그의 애국심을 들어냈다. 이 《독통감론》은 청말에 서양세력이 중국에 침투해 올 때에 거의 모든 학생들이 손에 들고 다니며 읽고 민족을 생각하고 애국심을 키워 나갔다.
이러한 《자치통감》의 효용은 우리나라에 들어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의 제일가는 군주라고 칭송되는 세종은 이 한문으로 된 《자치통감》을 보다 쉽게 읽히려고 세종이 신하들에게 훈의(訓義)를 달게 하였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온다. 훈의란 어려운 단어나 용어의 뜻을 풀어 나가는 작업이었다.
세종은 직접 밤늦게까지 이 책의 교정을 보다가 안질이 생겼고, 완성된 다음에는 각도에 종이를 만들라고 명령하고 이것을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사정전(思政殿) 본 《자치통감훈의》이다. 또한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전통시대에 서당에서 학동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이상을 키워갔고, 과거시험에는 《자치통감》으로 시험을 치러 인재를 선발하였다.

4. 혁명세력과 개선세력의 대립

이 책의 저자인 사마광(1019-1087)은 북송의 중반을 살았던 사람이다. 서기 960년에 조광윤이 북송을 건국하였으므로 그가 태어난 것은 송왕조가 건국한 후 60년 쯤 되는 해였고, 그리고 그가 죽은 다음 60년 쯤 뒤인 1126년경에는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거란에 붙잡혀가고 겨우 남쪽에 남송이 세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북송시기의 중간쯤 되는 시기였다.
북송왕조시대를 볼 때에 사마광이 살던 시대는 북송의 문운이 빛나던 시기였다. 사마광이 한창 활동할 시기였다고 보이는 서기1060년(인종 가우 5년)은 사마광이 42세였다. 역사에서 보통 사마광을 구법당의 영수로 알려 졌지만 신법당의 영수로 알려진 왕안석은 이 때에 40세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철학분야에서 상수학(象數學)으로 역사철학을 확립한 소강절은 50세였으며, 태극도설을 지어서 송리학의 우주론을 설명한 주렴계는 44세였다. 그 뒤를 이어 태허론(太虛論)으로 기론(氣論)을 세운 장횡거는 40세였으며, 이기론(理氣論)을 정리한 정명도 정이천 형제는 각각 29세와 28세였다.
또한 정치분야에서 황제를 잘 보필한 명신(名臣)으로 알려진 한기(韓琦)는 52세였고, 부필(富弼)은 56세, 문언박(文彦博)은 58세였다. 그리고 구양수가 53세였고, 당송8대가의 한 사람인 증공(曾鞏)은 42세였으며, 당송 8대가인 소씨 3부자(蘇洵, 蘇轍, 蘇軾)의 한 사람인 소식은 25세였으니,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이 전해지는 사람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시기에 이렇게 많은 명사가 배출된 것은 당말(唐末) 이후 근 150년간의 절도사들의 등장과 혼란과 분열의 연속을 마감하고 ‘술잔에 군권(軍權)을 녹여 버린’ 송초의 문치정책의 결과였다. 덕택에 큰 전쟁이 없었고,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도 없었으며,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다시 새로운 문제가 싹튼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동안 황하유역 출신이 중원지역을 주도하여 왔으나, 과학기술의 발달과 서북지역에서의 이민족 왕조와 대치하는 상태는 양자강 유역의 개발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양자강 유역지역은 경제적으로는 중요한 생산기지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황하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수와 비등하게 되었다.
이 결과로 과거시험에서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동남지역 출신의 합격비율이 높아지고 서북지역과 균형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것은 결국 전통적인 우위지역과 신흥하는 지역간의 균형을 말하는 것이고, 정치적 헤게모니를 두고 두 지역간에 강하게 대립할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상황은 북송이 건국하면서 미봉하여 왔던 문제를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사실 북송은 건국하면서 줄곧 북방에 있는 거란족의 요나라와 서쪽에 있는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와 대결하고 있었다. 커다란 전쟁 없었고 적당한 정도의 군사력으로 대처하거나 엄청난 재부를 가지고 회유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북송정부의 재정적 압박을 가져왔고, 그 부담의 상당한 부분을 동남지역에서 부담해야 했다.
그리하여 동남지역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개혁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그 대표는 왕안석이었다. 왕안석은 혁명론(革命論)을 주장한 맹자(孟子)를 신봉하며 개혁을 주장하며 새로운 법제(法制)의 수립을 시도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서북지역을 대표한 사마광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주장한 공자(孔子)를 존숭하여 현행의 법제(法制)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개선할 것을 주장하여 대립관계가 표면화 되었다.

5. 신종의 줄타기와 《자치통감》의 저작

당시의 황제는 영종(英宗)의 뒤를 이은 신종(神宗)이었다. 신종도 분명히 당시에 북송이 갖고 있는 문제를 알고 있었다. 정치적 역학에서도 신흥세력의 중심지인 동남지역과 전통세력의 중심지인 서북지역 가운데 어느 쪽을 홀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정치는 신흥세력에게 갈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왕안석의 집권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왕안석은 급진적으로 법제의 개혁에 나서서 이른 바 신법(新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그 부작용 또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새로운 법제가 경제적 구조가 다른 동남지역과 서북지역에 동일하게 적용될 때에 두 지역의 이해는 상반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왕안석의 신법은 사마광을 비롯한 전통세력들은 왕안석의 급진적 개혁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신종은 정치를 신법당에게 맡기고, 그에 반대하는 구법당에게는 견제 역할을 맡김으로써 황제권의 절대화를 꾀하고 있었다. 신종은 왕안석에게 재상을 맡기고, 사마광에게는 급진적 개혁을 견제하는 이론을 개발하게 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역사의 정리를 통한 급진개혁을 비판하게 한 것이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사마광은 신종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낙양에 가서 다시 17년의 세월을 소비하며 불후의 명작 《자치통감》을 저술하게 된다. 《자치통감》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역사사실 속에서도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 개선을 주장하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역사 자체의 본질을 추구하다 보면 역사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또 역사란 일부러 개혁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 자체가 개선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급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들어 증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이 의도적으로 개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술수의 한 방법으로 본 것이기도 하다.
사마광은 신종이 《자치통감》을 쓰라고 부탁한 것을 기화로 자기의 이상을 펼쳐 보였다. 자료의 선택에서 물론 독자로 하여금 역사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인물과 사건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마치 대하소설처럼 흥미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역사란 억지로 개혁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누이 설명하였다.
이러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모자란다고 생각할 때에 사마광은 사건을 서술해 놓고 이 사건에 대한 견해를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철학으로 해석해 놓고 있다. 이것은 바로 그의 사론(史論)인 셈이다.

6. 지금도 《자치통감》은 의미가 있는가?

인간의 지식이란 경험의 소산이다. 앉아서 생각만으로 이루어 진 것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의 수많은 경험을 나 자신의 경험으로 살리는 길이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첩경일 것이다. 인간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그리고 미래에도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가 있다면, 과거의 인간이 경험한 것들은 오늘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같은 유형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자치통감》에서 동아시아에 벌어졌던 1,362년 동안 인간들이 성공하고, 실패하고 속고 속이며, 지배하고 지배받았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결국 경험이 많은 사람이 실패할 확률이 적은 것처럼 수많은 인간의 삶의 모습을 《자치통감》을 통하여 경험할 수가 있다면 오늘 날에도 지혜의 보고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생각에서 동양에서는 《자치통감》을 세 번 읽은 사람과는 말 상대를 말라고도 했다. 근대에 그 혼란 속에 빠진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은 연안으로의 대장정 가운데서도 《자치통감》을 한번도 손에서 놓은 일이 없고, 우리 역사의 성군인 세종은 안질을 무릅쓰고 《자치통감훈의》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래서 《자치통감》은 ‘영원한 인생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많은 이에게 삶의 지혜를 주었던 것이다. 주(周)왕조에서부터 후주(後周)까지 모두 16개의 왕조의 흥망성쇠와 이민족의 등장과 변화, 그 속에서 생긴 인간의 생각, 이 생각이 만들어 낸 제도,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통치자는 성공한 통치자가 되기 위하여 읽어야 할 것이고, 통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통치자가 되는 길을 찾기 위하여 읽어야 하며, 통치를 받는 사람조차도 통치자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며 웃어 주기 위하여서라도 읽어야 할 영원한 고전이다. (중앙대학교 사학과 교수 , 권중달)

정창원 ::: 4. 혁명세력과 개선세력의 대립 밑의 연대에 오타가 있는거 같습니다
권중달 ::: 고맙습니다.
권중달 ::: 사마광의 생존연대는 1087년 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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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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