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18 15
  View Articles
Name  
   권중달 
Subject  
   정구복교수님의 '나의 어머니'
정구복교수님이 쓰신 ' 나의 어머니'는 개인의 가족사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가족사를 통하여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이 책은 거대한 국가사나 세계사가 아니더라도 가족사를 통하여 한 시대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여 역사 저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정교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300부를 개인이 인쇄하여 돌려 보았다고 하고 제게도 한부 보내 주셨습니다. 출판된 책이 아니어서 구해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기회가 없고, 특히 내가 이번 학기에 새로이 역사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사학과 1학년)에게 '현대사회와 역사'를 강의하면서, *** "역사의 소비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창조자가 될 것인가?"의 주제로 강의하는데 참고로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여기에 그것을 실려 봅니다. 다만 사진 자료는 이를 삭제하였습니다.

                    우리 어머님

정구복(鄭求福), 자 자여(自汝), 자호 낙암(樂庵)
1943년(계미) 3월 17일생. 충남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 출신
적곡국민학교, 정산중학교, 공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 역사교육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문학석사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문학박사
육군사관학교 교수, 전북대학교 교수, 충남대학교 교수 역임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한국학대학원장, 한일역사연구공동위원회 위원, 한국사학사학회 부회장,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임진왜란연구회 회장
저서: 『한국인의 역사의식-고대편』
      『역주 삼국사기』5책(공저)
      『장평초등학교60년사』
       『한국중세사학사』 I, II 2책
       『고문서와 양반사회』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
        󰡔인물로 본 삼국사기󰡕
       이달의 문화인물 『반계 유형원』, 『뇌천 김부식』, 󰡔쌍매당 이첨󰡕을 집필        

[목차
머리말
1. 어머니의 출생
2. 불우한 유년시절
3. 결혼과 고된 시집살이
4. 아버지의 가출과 방황
5, 아버지의 일본 입국과 5년간의 일본생활  
6. 귀국과 해방
7. 아버지의 죽음
8. 쥐구멍에 볕듦
9. 큰 아들 결혼
10. 어머님의 기쁨
11. 회갑
12. 7순과 수의
13. 8순잔치와 고향을 떠남
14. 불교의 귀의와 병과의 싸움
15. 임종과 49제


범례
1. 본서에서 다룬 가족사항은 본서의 이해를 위해서 필요한 부분만을 다루었다. 외가의 가계는 외가, 친가는 6촌까지, 고모 이모 가계는 4촌까지 다루었다.
2. 가계에 대한 설명은 주로 처음 나오는 부분에 ★표를 붙여 [가족사항]으로 서술하였다.
3. 본  중심 내용에서 빗겨 나가는 서술에는 [사랑방나들이]라는 공간을 설정하여 기술하였다. 이는 본문과 관련된 역사내용을 첨가한 것이다.    
4. 본문 서술에서는 원칙적으로 존칭을 생략하였다. 글을 읽는 사람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문장은 평어법을 사용하였다. 단지 어머니와 어머님이란 두 가지 표현을 섞어 사용하였고, 필요한 경우에만 씨를 붙이기도 하였다.
5. 어머니의 일생을 다루면서도 당시의 일반적 역사 사실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시도하였다.  


머리말
  나의 어머님은 조선왕조가 멸망하기 바로 전 해인 1909년 9월 13일에 태어나셔서 2000년 12월 24일에 92세로 돌아가셨다. 부여의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이 바라다 보이고 금강과 금강천이 멀리 감싸 흐르고 있는 칠갑산의 산줄기 아래 훤히 트인 평화로운 장평면 분향리 광명들 선산 아버지 묘소에 함께 모셨고, 바로 옆자리에는 우리들 4형제가 들어갈 납골당을 마련해 두었다.
나의 어머니는 우리 7남매의 어머님이기 때문에 “우리 어머님”이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특히 “우리 어머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이 책이 나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았던 우리들 모두의 어머니 상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어머니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을 한다고 하였으나 모든 이의  어머니에게 공통되는 모습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사진과 성명, 출생과 사망연월일 만을 바꾸면 바로 독자들 여러분의 어머니 이야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20세기 한 세기를 사셨다. 사회적으로 이름을 남긴 것도 아니고, 특별한 활동을 하신 일도 없다.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시골 아낙네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일생을 책으로 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역사의 창조는 한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노력이 합쳐진 것이고 따라서 역사의 주체는 평범한 모든 사람이라고 믿는 나의 역사관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평범한 여자의 역할은 비록 사회운동이나 정치적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가족을 이끌어 오는 힘이 되었고, 더구나 일제 식민지 하에서 한국사회를 지탱해온 저력은 가족에 있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원동력이 되었다. 가족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기초단위의 사회집단이다. 그리고 가족의 힘은 모든 개인이 성장하기까지 공동의 책임을 졌던 사회적 집단이고 특히 우리의 전통사회에서처럼 애경사를 중시하는 경우 친족의 기초단위였다. 가족은 마르크스가 말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부를 사용한다는 이념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예이다.
  어머니 세대의 가족은 한 집안 4대가 살았던 대가족이었다. 가족은 그 구성원인 개인의 활동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규제하기도 하였다. 가족은 오늘날 핵가족으로 변했지만 그 중요성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거의 공통된다.
   이런 까닭에서 일연선사는 󰡔삼국유사󰡕를 쓰면서 가정의 효선문제를 하나의 항목으로 다루었고 동양의 기전체 역사서술에서는 열전부분이 가족이나 가정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며,  편년체 사서에서도 개인의 졸년 기사에 그에 관한 기록을 중시하여 다루었다.  
  그러나 서양의 역사학이 들어온 이후에는 역사서술에서 가족이나 가정의 문제는 거의 완전히 배제되었고, 특히 굴직 굴직한 사건 중심의 역사에서는 이런 문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 서양사의 학문적 전통에 전기학이란 것이 있지만 이는 위대한 사람의 일생을 기술하는 것으로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왕왕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처럼 사회적 활동이 거의 없는 경우 이를 책으로 쓰는 사례는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엄격한 의미에서 어머니의 전기가 아니라 20세기 한 가족의 생활사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나의 어머니 개인을 부각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제 시대 사회의 기초단위였던 가정을 지켜온 장본인으로서 또 가족과 가정의 핵심인물로서 어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마치 대 전쟁에서 전사한 무명의 용사들도 전쟁의 한 주역이었듯이, 나의 어머니는 그 점에서 우리 역사 창조의 주역이었음을 당당히 밝혀내려는 것이다.

  이 책을 쓰는 둘째 목적은 역사에서 현대사가 가장 소중하다는 나의 역사관을 밝히기 위함이다. 역사에는 과거의 역사가 있고, 현재의 역사가 있으며 또한 미래의 역사가 있다. 역사가는 과거의 역사만을 소중히 여기지만 과거의 역사보다는 현재의 역사가 중요하고 그보다는 미래의 역사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역사는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고, 현재는 항상 순간적으로 지나쳐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는 현재를 만드는 기초이고 현재의 역사는 내일의 역사를 만들려는 의식을 가지고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는 먼 과거의 역사를 대상으로 연구하고 과거의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지만 그 관점과 서술의 태도는 현재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역사가는 왕왕 과거의 역사의 학문적 체계화에만 신경을 쏟고 있지만 역사가는 일반 시민이 역사의 소중함과 역사의 의미가 자신의 일상생활과 직결된 것임을 가르쳐 줌에 소홀히 하고 있다. 필자는  먼 과거의 것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현재를 연구함이 더 소중하고 학문적 체계화보다는 일반 국민의 역사의식을 넓혀주는 것이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더 적절한 것으로 믿는 나의 역사관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연구의 목적은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현재 우리의 문제의 근본원인을 정확히 알고 미래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현재와 유리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된 과거이고 현재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회적 문화적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가랑잎이나 솔잎이 쌓이듯, 그렇게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회적, 또는 문화적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시간에 따라 인과 관계로 얽히고 설킨 과정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역사학적 해석을 통해서만 정확히 얻어진다. 이 책은 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기라기보다 현재의 각종 문제점을 성찰 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배경을 서술한 것이다.  즉 글로 그려진 모습 뒷편 저켠에 있는 저자의 깊은 뜻을 독자들은 읽어 주기를 바란다.
  거듭 말하거니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는  근·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저자가 근·현대사를 전공하지 않으면서도 이 책을 통하여 한국의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를 다루려고 하는 내 자신의 욕심이 작용한 것이다.  

  이 책을 쓰는 셋째 목적은 어느 시대이든  개인은 그 시대의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임을 밝히고자 함에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은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사람이 타고난 자신의 생명을 다 살거나 아니면 전쟁에서 비명에 죽는 것이라든지, 경제적 부를 누리거나 굶주리거나, 교육을 받고 못 받는 혜택의 여부, 심지어는 형무소에 가서 복역을 하는 죄수까지도 그렇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원인이나 노력보다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구체적 개인의 일생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함이다. 특히 시대가 크게 변화하는 시기일수록 개인에 미치는 역사의 힘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홍수에 쓸려 내려가는 나무 잎처럼 말이다. 물론 개인 중에는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는 바위 같은 존재도 있지만 거의 모든 일반 사람은 역사의 흐름 속에 함께 떠내려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느 누구이든 역사의 산물이며, 그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일생은 역사를 떠나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 인간은 한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그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사실도 틀림이 없다. 비록 거대한 역사를 움직임에 나의 개인적인 힘이 뭐 그리 크게 작용하겠느냐고 의심하겠지만 그 약한 존재들이 하나씩 하나씩 뒷전으로 다 물러나고 나면 이 역사를 창조하는 주인은 누구도 있을 수 없다. 마치 거대한 만리장성의 성이나 대청호수의 댐에서 조그만  하나의 돌을 빼어내고 한줌의 흙을 파내기 시작하여 모두 파내어 제키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흔히 역사라고 하면 국가적인 역사만으로 알고 있으나 개인의 역사나 가족의 역사가 없는 국가의 역사는 마치 인간을 말하나 구체적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는 추론화한 역사의 공허한 허상일 뿐이다. 국가의 전체의 역사도 개인의 역사를 통하여 이해될 때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다. 국가라는 거시 사학으로부터 최근 개인 중심의 미시사학이 중시되고 있는 것도 이런 점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쓰게 된 네 번째 목적은 역사는 우리 일상생활에 요긴한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점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역사를 모르면 한 개인이 한 인간으로 성숙할 수 없고, 역사를 무시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 유지된 나라가 없다. 역사를 존중해온 나라는 역사를 계속 유지하여왔고, 탄탄한 문화와 사회의 발전과정을 밟아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역사를 우리처럼 등한시하거나 홀대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역사를 일반사람들이 경시하는 것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사라는 것은 시간에 의하여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은 사람들이 창조하는 것이다. 물론 역사의 창조에 개인이 하는 역할과 기능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의 역사를 보면 그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노력이 결집된 것이다. 역사를 창조한다는 말은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더 좋은 사회로 만들려는 인간들의 의지와 의식, 노력의 결과이다.
그리고 역사는 인간학의 가장 중심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인간 집단의 문화학이고 인간의 모든 지식과 행동이 담겨져 있는 창고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역사에 남고 역사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역사는 우리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기초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역사를 등한시 하고 있는 풍조가 아주 짙다. 오랜 역사를 유지해온 나라이면서도 역사를 이처럼 등한시하고 있는 나라는 문화가 발전한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반 사람의 탓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에게 책임이 있다. 일반 국민을 역사 속으로 끌어드리려는 역사가의 노력이 부족하였다.  내가 연구하는 역사학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나의 가까운 친인척에게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회갑을 맞이하여 나의 가까운 친인척에게 역사지식을 보급하기 위해서 그 대상도 쉬운 문제로 잡았고, 쉬운 내용으로 쓰고자 하여 어머니 일생을 책으로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쓰는 선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역사를 쓰는 것은 반드시 역사학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누구나 현대의 역사가가 될 수 있다. 일기를 쓰고, 일대기를 꾸밈이 없이 쓰는 것은 바로 훌륭한 역사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모든 사람이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회에서는 이 책과 같은 부모의 이야기, 또는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마음만 먹으면 쉽게 쓸 수 있다. 그런 하나의 예를 제시하기 위함이 이 책을 쓰는 넷째의 목적이다.

또한 어머니의 일대기를 쓰는 다섯째의 이유는 역사에는 역사가들이 시대구분을 하여 고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구분하지만 역사는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의식 속에는 알건 모른건 간에 저 먼 원시시대나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오랜 의식이 침전되어 있음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런 의식은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은 어머니의 일대기 속에서 사랑방나들이를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설명하려 하였다.
      
끝으로 나는 어머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달리 없다. 부모님에 대한 은혜는 태산과 같고, 하늘과 같아서 아무리 갚으려 해도 이를 다 갚을 수 없다. 김소은이란 시인의 말처럼 “나의 어머니가 비록 문둥병환자일지라도 나는 나의 어머니를 글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다”라고 한 말처럼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우리들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들이다.
   어머님이란 아버님을 포함한 부모의 대표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거의 모든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우리 어머니는 자신을 불살라 우리들 7남매를 위해서 사셨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으셨다. 모든 활동의 목적과 삶 전체의 의미를 가족과 자식에 두셨다. 이 점은 어쩌면 너무나 숭고하고 진실되어 성스럽다고 표현하여야할 정도이다.
  그렇게 소중한 어머니이시건만 당신이 아픔을 느끼실 때 자식인 나는 이를 대신할 수 없고, 병고와 싸우는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만 보면서 인간의 무능함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어머님이 세상을 뜨신 후에는 우리들의 나이가 많아졌음을 갑자기 느꼈다. 항상 어머니 앞에서는 우리들은 어린이 같았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는 자주 전화를 걸었고 자주 만날 수 있던 형제 자매들이 멀어지는 것만 같고, 외갓집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어머님의 역할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였는가를 거듭 거듭 실감하게 된다.  어머니는 집안의 커다란 구심체였음을 정말로 실감하고 있다.  
   이 점을 책으로 쓰는 것이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의 일단을 표하는 것이며,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부모님에게 효도를 극진하게 할 것을 당부하려는 목적에서 이 책을 쓴다. 우리 속담에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의 경구를 명심하기 바란다.
  어머니라는 말은 순수 우리 말이다. 어린이 때에는 엄마, 엄니라고 인간이 최초로 배우는 말 중의 하나이다. 엄마나 영어의 Mother, 독일어의 Mutter도 어린애가 입술을 떼면 가장 쉽게 발음할 수 있는 말이다. 나를 낳아주신 분도 어머니이고 처음으로 접하는 인간도 어머니이다. 유교에서 부모의 상복을 3년간 입는 것은 세살까지 젖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 사람인 할아버지한테 어머니가 자칭하는 말이나 할아버지가 나의 어머니를 지칭할 때에는 에미라고 칭한다. 어머니는 한자로는 모(母)라고 표현된다. 모라는 한자는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형상한 글자이다. 모의 뜻은 어머니라는 뜻 이외에도 크다, 무겁다, 근본,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모교라고 함은 내가 졸업한 학교라는 뜻이고, 모형, 모제, 모매라고 함은 동복의 형제자매를 뜻한다. 중국식의 어머니의 존칭은 천지(天只)라고 하는데 이는 시경에 「母也天只」라는 전고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 只자는 어조사일 뿐이다. 어머니는 하늘이라는 뜻이다. 유교적 전통으로는 살아있는 어머니를 모라고 칭하고 살아있는 아버지는 부(父)라고 칭하나, 돌아가신 아버지는 고(考)또는 선고(先考)라고 칭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는 비(妣) 또는 선비(先妣)라고 칭하나 한국어로는 살아계실 때에도 어머니이고 돌아가셔도 어머니이다. 그러나 한자의 모의 존칭은 모친이라고 칭하고 남의 어머니를 칭할 때에는 자당(慈堂)이라고 칭한다.  
   충남 청양 칠갑산 산자락에서 자란 시골 떼기인 내가 대학의 교수로 성장하게 된 데에는 나의 노력보다 어머님의 힘이 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내가 역사학을 전공한 자로서 어머니의 일생을 통한 현대사의 정리를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지는 20여 년 전부터이다.  그리고 이 책을 쓰겠다는 말을 어머님 생전에 말씀드렸고, 가까운 사람에게 이미 널리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의 어머님은 이름 없는 시골의 평범한 한 아낙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긴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래서 연보와 같은 기록도 없다. 그리고 여기에 서술되는 내용은 지극히 가정적인 사소한 문제이다.
  어머니로부터 틈틈이 지난 날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해주시는 것을 듣고 메모를 해두었다. 어머니의 연세가 많아지면서 어머니의 기억력을 되새기게 하는 일은 바로 당신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돌아가시기 전 20년 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여쭈어 메모해두었다. 어머님의 이야기를 메모해둔 것을 보고 다시 글로 옮길 적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혹 강의실에서 어머님의 이야기를 하다가는 나는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5년간 어머님을 꿈에서라도 뵙고 싶어서 밤늦도록 사진을 보고 어머니에 대한 글을 하루 종일 다루어도 꿈에 나타나시지 않는다. 아마도 편히 잠드신 것 같다. 어머님의 죽음은 나의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어머니의 연세가 되는 노인을 만나면 나의 어머니인 것처럼 대한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어머님이 살아 계시던 일생동안 가장 부러웠던 것은 양친 부모를 함께 모시는 사람이었다. 현재 나는 천하에 고아인 셈이다. 가장 부러운 것은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다. 어머니가 90세를 넘도록 살아 계실 때에 우리 형제 자매들이 내심  걱정한 것은 7남매 중 누가 어머니보다 먼저 가는 불효를 누가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막내 동생이 회갑이 가까울 정도인데 어머니보다 먼저 갈 사람이 없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  
  비록 어머님의 일생이라고는 하였지만 7남매 중 나와 어머니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절대로 나를 자랑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이는 앞으로 자라는 세대들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여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더욱 작용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역사기록을 남기겠다는  자료로서의 목적보다는 정신적,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의식이 더 깊이 깔려 있다고 함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본서에 쓴 자료는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제가 직접 체험한 일, 그리고 가족에 관계되는 문헌자료, 제적등본 등을 가능한대로 보충하고, 비록 사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친 바는 없지만 사회변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회의 큰 변화나 사건을 배경으로 서술하려고 하였다. 이를 배제하면 한낮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날조하거나 근거 없는 서술은 없다. 가능한 한 역사의 사실 그대로를 기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 중에서도 현재 밝히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는 의식적으로 뺀 부분도 있다. 그것은 꼭 밝혀야할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모두 나와 가까운 당사자들과 관련된 문제임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개인 자신에 관한 문제는 가능한 한 숨기지 않고 쓰도록 노력을 했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씀에 두려운 바가 있다. 이는 모든 당대사를 씀에 부닥치는 문제가 이 책을 씀에도 똑 같이 생긴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일생을 설명하기 위하여 등장시켜야 하는 친인척에 대한 설명에 혹 잘못된 설명이 되거나 기분 좋지 않게 서술된 것, 숨겼으면 하는 일들이 문자의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당사자들에게 대단히 미안스럽게 생각한다. 이에 관련된 분들은 나의 이런 서술이 악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역사를 이해함에 하나의 자료가 되기를 위함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하여 주었으면 감사하다.
  “우리 어머님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에 해당되는 일일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바로 나의 형수님, 제수님, 누님과 누이동생,  그리고 나의 처의 이야기도 되듯이 사회의 뒷전에서 남편을 위해서 묵묵히 헌신하는 여성들의 노고에 대한 이야기도 된다. 가족을 위해서 남모르는 그늘에서 열심히 살아준 가정 주부의 그 고마움을 후손들이 알아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모든 여자는 약한 듯하지만 남자보다 강하고 위대한 존재임을 온 천하에 밝혀둔다.
  이제는 아무리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부모님들이 불행하게 사신 이유는 당신들에게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즉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셔서 일생을 고생으로 살아가신 부모님이 다음 세상에서는 제가 올리는 기도로 좋은 인연을 만나셔서 교육도 마음껏 받으시고 개인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고, 개인적 삶의 목표를 설정하여 살아보시기를 부처님께 지극 정성의 마음으로 기원 드린다.


   2003년 2월 일 청계산 자락 운중동 연구실에서
                        회갑을 맞이한 셋째아들 구복 올림



1. 어머니의 출생

고목이 쓰러질 때에 태어남-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
  우리 어머니는 나라가 멸망하기 바로 전 해(1909)에 태어나셨다. 개인의 운명은 물론 한 가정 운명의 큰 틀을 결정짓는 것이 국가이다. 국가가 평탄하고 발전할 때에 태어나면 그 혜택을 제대로 받지만 국가의 운명이 고달프면 개인과 가족의 생활도 역시 고달프다. 어머니는 일생동안 나라가 여섯 번 바뀌는 삶을 사셨다. 대한 제국, 일제, 미군정, 대한민국, 인공치하,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았다. 나라는 개인의 삶에 터전이고, 큰 울타리이다.
당시 나라의 이름은 대한제국이었으나 실은 조선왕조 말기였다. 국가의 체제는 황제를 지칭하였으나 이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세력이 국내에서 물러나자 조선왕조 내내 명나라, 청나라의 위세 아래 황제를 칭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고 황제를 칭했다(1896). 그러나 황제국은 허울일 뿐 일본의 지배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 때에는 일본에 나라의 외교권, 군사권, 통치권까지 거의 다 뺏긴 시기였다. 마지막 황제 순종 3년 즉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에 여진족이 살던 현재의 함경북도 지역에서 출생하여 왜구의 격파에 능력을 발휘한 무장인 이성계와 그의 일당인 신진 학자인 정도전 등에 의하여 고려의 왕실을 탈취하여 세워진 국가였다. 조선왕조는 양반과 왕실이 공동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합작한 왕조였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사상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는 구호일 뿐 진실로 백성을 위해서 노력한 왕은 4대임금인 세종(재위 1419-1449)과 21대임금인 영조(재위 1725-1776)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왕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에 급급한 임금들이었다. 조선왕조가 건국되기  2년 전에 과전법이라고 하는 토지제도의 개혁이 이성계와 그 동조세력에 의하여 이룩되었다. 이 토지개혁은 조선왕조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당시 기득권층의 이익을 지키기에 급급하였다. 즉 전직관료와 현직과료에게 얼마의 조세권을 받도록 할 것인가를 규정하였을 뿐이다. 일반 농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배려는 전혀 없었다. 과전법에서 세금을 받아먹도록 되어 있는 사람을 토지의 주인(田主)이라고 칭하였음을 통하여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토지에 대한 세금이 10분지로 줄인 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일반 역사학자들은 주장하지만 당시 일반 농민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남의 토지를 경작하는 형편이 많았다. 당시의 일반 농촌의 사정은 지주들의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들에게 조(租)라는 명목으로 수확량의 반을 바쳤다. 이 과전법의 실시로 인하여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이 오히려 토지를 세력을 가진 양반들에게 토지를 뺏기는 결과를 조장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가 양반과 왕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합작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3대임금인 태종(재위 1401-1418) 때에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를 제한하자는 논의가 조정회의에서 논의하는 과정에서 태종이 이를 중지시켰다. 그 법이 시행되면 가장 심한 피해를 입는 것이 왕실과 공주. 세자들이라는 말을 당시의 판서가 귀속말로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조의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어 16세기 말 가장 많았을 때에는 전 국민의 삼분지 일이 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선왕조가 양반과 왕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합작했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양반들만을 인정하고 고려왕조에 향리나 중앙의 서리계층에서 양반으로 상승하는 길을 완전히 차단시켜 향리나 서리는 그 직에 세습하도록 하는 법을 마련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향리와 서리는 행정임무를 담당한 중요한 관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이를 혈연적인 이유만으로 승진을 규제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왕조는 건국된 지 꼭 200년에 되는 해인 1592년에 일본의 침략을 받자 관군의 육군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전투다운 전투를 벌이지 못하고 완전 패배를 하여 도망치기에 바빴다. 부산항에 상륙한 후 20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평양까지 함락되어 함경북도 북단까지 일본군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연전연승하였고, 지방에서 일으킨 의병과 명나라 원군으로 일본군은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철수하였다. 이 무렵 조선왕조는 망했었어야 하는데 유지되었다. 지도층은 4분5열 당파로 나뉘어 싸웠고, 주자학 이외에는 다른 학문은 완전히 배척하여 사상적으로 굳어진 사회였다. 문화적 쇄국정책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는 국가의 현상을 유지하기에 급급하였고, 19세기에는 세도 정치가 이루어져 지배층이 세습되었고, 행정이 부패되어 일반 국민은 엄청난 시달림을 당했다. 19세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앞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어둔 시대였다. 천주교가 전래하였으나 이교도라는 이유로 참형을 당하였다. 해안에는 이양선이라 불리는 서양배가 출현하여 국가를 위협하였으나 국가의 문은 굳게 닫아 은둔국이라고 칭할 정도가 되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서양에 문호가 열려 이어서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의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입하였으나 당시 역사의 방향을 제대로 파악한 인물이 적었다.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의 젊은 개화 혁신파들이 쿠데타를 통해 민씨의 보수정권을 탈취하였으나 3일 만에 정국이 뒤집히었다. 이는 일본의 힘을 믿었지만 청국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세개의 내정간섭이 일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 전쟁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청군의 도래로 청일전쟁이 국내에서 일어났고, 일본이 승리하자 지금까지의 청국의존적인 세력이 밀려나고 일본의 후원아래 1894-95년의 갑오개혁이 일어났다.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체제가 타파되고 새로운 법체제로 개혁되었으나 이를 실현하기에 우리의 자주적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종 대에 창제한 한글이 이후부터 국문자로 인정을 받아 순 한문을 버리고 국한문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과거의 신분적 차별이 법제적으로 없어졌다. 국가의 나아갈 방향이 개화를 하여야 한다는 추세가 강하게 일어났다. 이에 국민을 역사의 주체로 끌어들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독립협회 운동이었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의 발간을 통하여 세계의 새로운 지식을 알렸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민중을 개화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지식인 유학자들을 새로운 사상적 전환을 하게 한 것이다. 즉 장지연(1864-1921), 박은식(1859-1925), 신채호(1880-1936) 등은 애국계몽운동을 통하여 전 국민의 교육을 강조하였고, 지방마다 학회가 조직되어 학보의 발간을 통하여 또는 당시의 신문을 통하여 개화사상을 넓혀나갔다.
  그들은 기존의 유학만을 가지고는 현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하였고 언론을 통하여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의식을 널리 전파하였다. 또한 이 때에 지역과 당파와 혈연, 남녀노소를, 남자건 여자건 하나의 동포라는 민족의식의 고양이 일어났다. 당시 2천만 동포라고 칭하였으나 실제의 인구는 1500만 정도였다. 당시의 구호는 “아는 것이 힘이다” 이었고, 자주와 개화라는 기치가 높이 세워졌다. 국가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자주의식이 확립되어야 하며, 교육열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사회의식, 정치의식이 1896년부터 10여년이란 짧은 기간 안에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대한제국이란 국호의 개칭도 이런 분위기에서 일어났지만 법령이 아무리 개혁을 해도 이를 수행할 만한 근대적 훈련을 받은 행정 관료가 마련되지 못했다. 1895년 왕비가 일본인에 의하여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져 개화운동에 대한 유림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또한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식민지화는 1904년 외교권의 박탈, 1905년 일본인이 차관에 임명되는 차관정치, 1907년 군대의 해산을 통하여 국가의 명맥은 숨을 거두게 되었다. 마침내 1910년 왕조국가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약육강식이라는 이치상 당연한 것이라는 사회적 다윈니즘을 믿고 있었고, 약소국가의 서러움을 통렬히 느끼고 있었다.
  나라가 없는 백성은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고, 찬밥신세인 상가 집 개만도 못하다는 속담이 나왔겠는가? 일생동안 교육의 혜택도 전혀 받지 못했고, 생업에 대한 어떤 보장도 받지를 못했다. 또한 국가의 발전에 대한 희망도 가지지 못했다. 전 인민이 황야에 버려진 고아와 같은 존재였다. 물론 이는 당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다는 말이다. 물론 나라를 잃음으로서 생명을 바친 사람도 있고, 가족과 모든 재산을 버리고 외국 땅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망명을 떠난 애국지사도 있다. 어머니의 부모는 이런 적극적인 독립투사는 아니었지만 나라를 잃음으로서 나라의 혜택을 입지 못한 피해자였다.
  우리 어머니의 호적 이름은 서옥순(徐玉順)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일생동안 몇 번 공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별로 그렇게 친숙하게 불려지거나 사용된 이름이 아니다. 이는 이 시대의 모든 여자들의 공통점이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 관행은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양반의 경우 이름은 어려서 부르는 이름일 뿐 성인이 되는 관을 쓰면 이름자 대신 부를 수 있는 자(字)를 지어 사용하였다. 여자의 경우 아예 이름을 짓지 않고 호적에 올린 경우도 있다.
  어머니가 17살에 시집을 온 후로 시댁에서는 친정마을인 공주군 우성면 어천리의 고유이름인 여우내라는 동네이름을 따서 “여우내댁”, “여우내 아주머니” 등으로 친정에서는 시가인 충남 청양군 청남면 대흥리 갓점마을에서 딴  “갓점댁”, “갓점 고모”, “갓점 이모” 등의 주거지에 따른 택호로 불렸고 이웃집 사람들에 의해서는 자식들의 이름으로 “누구, 누구 어머니 라”고 칭해졌다. 이름은 단지 호적에 신고된 것일 뿐이었다. 택호는 조선시대부터 널리 사용되어온 여자나 남자의 별칭으로 사용되어 왔다. 택호는 벼슬을 한 경우에는 그 벼슬 이름을 따서 칭하기도 했고,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합격한 집안은 그 진사 또는 생원 댁에 성을 붙여 택호로 사용하였고, 일반 사람은 사는 곳에 의거한 택호가 가장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택호는 반드시 마을이름에서 따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군 또는 면의 명칭으로부터 따오기도 한다.  
  외할아버지는 달성서씨 병철(丙喆1874-1935)이고, 외할머니는 결성(結城) 장씨(1879-1918년)이다. 달성은 대구의 옛 이름이고, 결성은 현재의 홍성군 결성면으로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걸쳐 결성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공주시 우성면 어천리(버든열)에 사셨고, 외할머니는 청양군 정산면 덕성리(덕재라는 마을)에 사셨다. 우리 어머니는 네 번째 소생으로 딸 중에서는 둘째였다. 위로는 큰 언니, 큰오빠, 둘째 오빠가 있었다. 어머니는 1909년(기유己酉) 9월 13일에 충청남도 공주군(현재는 공주시) 우성면 어천리(魚川里) 292번지 여우내에서 태어났다. 유(酉)자는 12간지로 이 해에 태어난 사람은 닭띠라고 한다.
** 사랑방 나들이 1**
닭띠에 대한 상식
유자는 방위로는 서쪽을 의미하고, 시간으로는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를 의미한다. 유자의 해에 태어난 사람을 닭띠라고 한다.  닭은 개와 양처럼 인간이 최초로 사육한 동물 중의 하나이다. 기원전 6-700년 전부터 사육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닭은 머리에 관(벼슬)을 쓰고 있어 문(文)을 상징하고 발톱이 있어 무(武)를, 적을 만나면 물러서지 않고 싸운다는 뜻에서 용(勇)을, 먹을 것이 있으면 주위에 알린다고 해서 인(仁)을, 늘 시간을 정확히 알린다는 뜻에서 신(信)의 다섯 가지 덕을 갖추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의 오례의에는 닭은 동방의 생물로 인(仁)을 상징하기 때문에 봄 여름 제사에 제물로 사용한다고 쓰여 있다. 또한 닭은 알을 많이 낳음으로 다산(多産)의 상징한고 다자다복(多子多福)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닭은 태양의 새로서 하늘과 땅의 소식을  알리는 심부름꾼으로 생각해왔다. 우리 역사에서는 제주도의 무속설화 천지왕본풀이에 의하면 천지개벽을 예고하는 일을 닭이 알렸다고 한다. 즉 이 세상이 처음 개벽이 될 때에 천황(天皇)닭이 목을 들고 지황(地皇)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人皇)닭이 꼬리를 치며 크게 우니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의 혁거세 신화와 알영, 김알지 신화에 좋은 일을 미리 알리는 닭의 역할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신라의 초기 나라이름도 계림(鷄林)이라 하여 닭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고구려 무용총의 천장 벽화에는 닭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민족의 오래 동안 전해온 이야기인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도 닭과 연관이 있다. 이는 수탉이 하늘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우는 것이 나무꾼이 하늘에 놀라간 선녀를 그리워하여 우는 것을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지네와 장터’ 라는 이야기 속에 닭의 이야기가 나온다. 즉 황해도 장연에 계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하룻밤을 지내면 중 한 사람씩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절의 중들의 걱정이 대단히  컸는데 어느 날 한 도승이 자나다가 흰 닭을 많이 기르면 그 변괴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흔 닭을 구해서 길렀는데 어느 날 보니 닭의 부리에 피가 묻어 있어 이상히 여기고 닭이 가는 곳을 쫓아 가보았더니 한 발이 넘는 지네가 죽어 있었고, 이후 중이 사라지는 변괴가 없어졌다고 한다. 조선조에는 대문에 닭과 호랑이를 그려 붙여 액을 막아낸다고 하는 민속이 있어 왔다(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참조). 닭이 울면 귀신이 도망을 친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계가 없었던 오랜 동안 우리 민족은 닭의 울음소리고 시간을 알았던 커다란 은공을 닭으로부터 입었다.  

★ 가족사항 외할머니 장씨의 이름은 호적자료 상에 발견되지 않고 있다.  장씨의 아버지는 청양군 정산면 덕성리에 살았던 張在善(1856-1914)이고 어머니는 연안 차씨(?-?)이었다. 남동생으로 기현(琪鉉 1888-1954)과 두현(斗鉉 1898-1970)이 있었다. 두현 할아버지는 어머님의 외삼촌으로 나에게는 외외종조부이시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56년 겨울에 어머님과 함께 찾아가 직접 뵙고 할아버지가 쓰시는 사랑방에 3개월간 묵으면서 중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자료는 두현씨의 막내아들인 장수덕(전 정산면장)씨로부터 얻은 것이다. ★

  어머니의 큰 언니 이름은 정식(廷植1899-1982)이다. 큰 이모의 이름은 외할아버지의 제적등본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큰 이모의 호적은 둘째 외삼촌 정기(廷麒), 그리고 어머니(玉順), 다음에 세 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호적에는 이름이 1918년(대정7년) 3월 10일에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해 4월 5일에 출가하여 제적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결혼을 시켜 결혼신고를 하려고 보니 호적에 올라 있지 않음을 발견하고 이름을 지어 그 자리에서 호적에 올리고 혼인신고를 하였음을 제적등본의 사유 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생년월일을 호적에 1899년(광무3) 9월 13일로 기록하고 있다. 큰 이모님은 17살에 이모부는 16살(1915)에 결혼을 하였다 하니 결혼 후 3년 만에 결혼 신고를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뒤늦게 호적에 올렸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를 1녀로 올렸다가 어머니를 2녀로 정정되었음을 제적등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호적에 올리는 일은 이장을 통하여 신고함이 보통이었는데 어쩌다가 큰 이모가 호적신고에서 누락되었으나 이를 전혀 모르고 지냈다고 해석된다.

  **사랑방 나들이 2**
얼룩진 일제의 상흔이 가득한 우리들의 제적등본-- 조선시대의 호적과 근대이후의 호적의 차이점
  우리들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제적등본을 떼어보면 누구의 호적을 막론하고 일본지배를 받았던 뼈아픈 상흔이 두덕두덕 붙어 있다. 마치 한 사람의 일생동안 대문 앞에 달은 국기가 7-8번이나 바뀌었음을 들어 기구한 운명을 웅변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우리들의 호적 대장 원본에는 일제 지배의 흔적이 흔건이 배어 있다.
  즉 연호가 개국의 연호(1894년을 개국 503년, 1895년을 개국 504년으로 칭하였다), 건양(建陽 1896년의 연호), 광무(光武 1897년-1906년까지의 연호), 융희(隆熙 1907-1910년까지의 연호)의 우리 식의 연호, 일제의 명치, 대정, 소화의 연호, 이를 단기로 일괄 고쳤다가, 서기로 고쳐 썼고, 창씨개명한 사실과 광복 후 조선성명으로 다시 복구된 사실이 대부분 사람의 호적에 보이고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3년마다 호적이 작성되었고 이는 한번 작성된 호적은 장부상에 기록된 정체된 내용이다. 그리고 호주의 직함, 본관, 성명이 기록되고, 호주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를 4조(祖)라 하여 직함과 이름을 써넣었다. 그리고 호주의 처에 대한 성, 이름, 본관을 기록하고 처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를 기록하였으며, 호주와 함께 사는 사람을 기록하여 넣었다. 따라서 동거인을 상세히 기록한 사람도 있고, 자식조차도 기록에서 누락시킨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기 집에 소속한 노비는 함께 살고 있는 노비는 물론 외지의 타 군현에 살고 있는 노비도 한 명도 빠치지 않고 명단에 실었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당사자가 직접 신고하는 양반층의 경우 이 신청서를 “호구단자”라고 한다. 일반 평민이나 노비 등의 경우는 당사자의 신고보다는 동장이나 유향소 직임을 가진 사람이 써 넣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1896년 제정된 새로운 「호구조사규칙」이 마련되었으나 이제도는 이전 왕조의 호적과 같이 세금과 역의 부과에 그 작성 목적이 있었다. 1909년 3월 법률 제3호로 근대적인 민적법(民籍法)이 발효되어 현재의 호적법과 깊은 관계를 가진 법으로 바뀌었다.  민적법은 일제의 호적법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가족의 변동 사항을 이에 추가하여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즉 가족적 신분의 발생, 변동, 소멸 다시 말하면 출생, 사망, 호주변경, 혼인, 이혼 양자, 파양, 개명 등이 연속적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연속적인 호적의 변동사항은 제적등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 선대의 호적에는 일제 지배의 뼈아픈 상흔이 진하게 깃들여 있다. 그 예를 나의 외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제적 등본을 통하여 설명하여보겠다. 일제 초기에 민적부가 작성되면서 1874년생인 외할아버지의 출생을 개국연호로 계산해 실었다. 그러나 개국연호는 1894년과 1895년 2년간 사용되었던 연호인데 이를 소급하여 개국연호로 환산하여 썼으며, 명치연호로 고쳐 쓰기도 하고 대정 소화 등의 연호가 기록되어 있으며, 해방 후 단군기원을 사용하면서 모든 연대가 단기로 고쳐졌다가, 1962년에 서력기원을 쓰면서 서력으로 환산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명이 1940년 3-7월에 창씨 개명되었다가, 1946년 10월 22일 미군정령 223호 “조선성명복구령”에 의거 모두 옛 성과 이름으로 복구되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을 뿐이다. **
  
  이모부는 공주군 탄천면 송학리 408번지에 살던 함양 박씨 영두(朴永斗)의 둘째 아들 박흥식이었다. 그런데 탄천면 송학리 408번지 박흥식의 제적등본에는 1915년에 결혼한 이모부와 이모의 결혼이 1932년에 이루어 진 것으로 신고 되어 있다. 이는 외할아버지 제적등본에서 큰 이모가 제적된 사유의 기록과 맞지가 않는다. 아마도 이모부의 호적을 새로 정리하면서 일으킨 오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큰오빠의 양자
어머니의 큰 오빠 이름은 廷鳳(1901-1982)이다. 큰 오빠는 큰 이모가 태어 난 후 둘째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큰 아버지(徐丙奭 1871 -1935)댁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큰아버지는 같은 어천리이지만 여우  내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금강이 앞에 흐르고 있는 버든열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자라지 않았다. 큰집에서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였기 때문에 외할아버지는 큰아들을 낳자마자 형님 댁으로 양자로 보냈다. 아예 출생신고를 큰아버지의 아들로 올렸다. 그리고 나서 외할아버지 댁은 여우내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에 의하면 어린 아기가 엄마를 하도 찾아서 외할머니의 큰 동서 한씨가 아기를 업고 먼 길을 걸어 왔으나 밭에서 본 생모 외할머니는 전혀 본 체도 하지 않고 완강히 따돌려 보냈다고 하여 주위 사람들이 지독한 사람이라고 하는 평을 받았다 한다. 이에서 외할머니의 성품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법제도를 떠나 아들을 낳아 양자를 줌에는 생모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당시의 사정으로 미루어보아 생모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생부의 뜻에 따라 입양을 시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설령 생모가 동의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가문의 위세, 양반의 체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므로 생모의 자유의사에 의한 흔쾌한 합의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당시 여성들의 발언권은 한 가정 내에서 그지없이 약하였다.

** 사랑방나들이 3**
조선왕조 가문의 지킴과 양자의 실례
  조선 후기는 큰집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통념이 확립된 것은 주자학의 영향이었다. 주자학은 학문적 계통을 도통이라 하고 왕실의 계통은 종통이었고, 국가의 이어진 계통을 정통이라고 하여 통(統)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주자학은 주희가 세운 학문이라 하여 주희를 높여 주자라 칭하고 인간과 우주의 본성과 이치를 연구함을 중심으로 한다는 뜻에서 성리학이라고도 칭하였다. 주자학은 송나라에서 체계화된 유학으로 신유학이라고도 칭하며. 고려 말에 원나라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수용되었다. 주자학의 이념은 조선 왕조 500년간을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였으나 사회통념으로 실현된 것은 16세기 이후부터였다. 16세기 초에  광산 김씨 김해가 생후 1주일 만에 증조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특히 김해는 손자항렬에서 양자로 들어갔다. 후계자를 세우는 것은 조선조에는 그 신청서를 예조에 올려 그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 국가의 예조에서 양자를 허락한 문서를 입후입안(立後立案)이라 한다. 그의 양자 신청서가 예조에 올라갔을 때에 조정에서 대신회의를 거치는 중대 문제로 비화되었다. 그 이유는 양자의 항렬이 손자항렬을 아들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여러 차례 중신회의를 거쳐 이 사례까지는 허용하지만 앞으로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으로 조정에서 합의를 보았다. 그렇게 결정된 중요 이유는 이미 양자로 들어와 제사를 받들어 온 사실을 뒤집을 수 없다는 점과 왕실에서 이전에 손항을 양자로 맞이한 것을 모두 환원시킬 수 없다는 점이 중요 원인이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양자는 양부와 생부의 동의를 받아야했고, 양부에게 적실과 첩실 모두에서 아들이 없어야 했으며, 생부의 차자 이하이어야 양자로 허용되도록 되었다. 󰡔경국대전󰡕의 법체제는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하여 폐지되고, 새로운 법제가 성립되었지만 호적에 올리기도 전에 아예 형님의 출생으로 호적신고를 한 것이다. 1894년 이후의 법제에는 양자를 할 수 없는 규정만이 있었다. 그리고 1898년부터 대한제국으로 체제를 바꾼 광무연간은 옛 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취지를 내걸었다. 다시 말하면 대한제국의 정치이념은 구체제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개혁을 참고로 삼아 실시한다는 복고적 개화정책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헌법과 같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은 1894년에 폐지되었다. 이 법전은 조선왕조의 행정부서가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의 6조 체계로 되어 있고,  각 조의 임무와 관할 사항을 규정하고 있어 6전(六典)체제라고 한다. 이 법전의 예전(禮典) 입후조(立後條)에서는 장자는 양자로 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조선조에는 양자를 하는 경우 생가, 양가 양쪽 부친이 합의하였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예조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예조 판서의 허락을 받도록 되었다.
  그러나 물론 차자가 아닌 장자를 형님에게 양자로 준 것은 17세기 말 전북 부안 김씨 집안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듯이 17세기 이후에는 큰집을 위해서 장자를 양자로 보낸 사례는 허다하게 발견할 수 있다. 즉 부안김씨 집안에서는 할아버지 김명렬은 둘째아들 김문의 장자 수종을 큰아들 김번의 아들로 삼게 하였다. 입후문서는 양자의 친아버지와 양아버지가 작성하여 예조에 올린 것이지만 이 문서에서는 장자를 차자라고 거짓으로 문서를 꾸몄다.
  더구나 이 경우 수종의 생부 김문은 이미 사망하여 그 생모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양자에 합의를 이루었음을 서명하였고, 죽은 남편의 제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지만 독신인 아들을 큰 집의 제사를 받들게 하기 위하여 입후입안을 예조에 올려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김번은 동생의 독자인 김수종을 양자로 맞아들인 후 전처가 죽고 후처를 얻어 후처로부터 두 아들을 낳았다. 후처라도 정실부인이었음으로 종통을 잇는 데에 조금도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김번은 양자를 파하지 않고 자신의 큰 아들을 동생의 제사를 받들게 하기 위하여 동생에게 양자로 주었다. 양자를 통하여 형제가 자신의 아들을 서로 맞바꾼 셈이다. 예조의 입안을 받은 양자를 취소하기가 복잡하였기 때문인지, 양자를 파하는 법제가 없었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이토록 조상의 제사 봉양을 위하여 양자를 서둘렀고, 중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이  큰집의 가통을 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부녀자들의 자유 의사를 짓밟았다고 할 수 있다. 가통을 잇는다는 것은 제사의 받듦을 끊이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유교에서 가장 덕스러운 일은 망한 나라의 왕실을 다시 잇게 하여 주는 일과 제사가 끊어지게 된 집안의 제사를 이어주는 일이라고 강조되었다. 따라서 큰집의 제사를 잇게 양자를 주는 일은 가장 덕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이런 가통계승의식은 조상의 제사를 끊임없이 오랜 동안 지내오는 관습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우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서 남아선호사상이 나왔다. 이는 오늘날에는 크게 약화되었지만 아직도 끈질기게 작용하고 있다. 아들을 못 낳아 가문의 제사를 끊어지게 함은 여자로서 시가에서 쫓겨 날 수 있는 일곱 가지 조건(칠거지악 七去之惡) 중의 한 가지였다.**


★ 가족사항  큰 이모 서정식(1899-1982) 17세에 결혼. 이모부 함양 박씨 흥식((1900-1979). 슬하에 네 딸과 아들을 하나 낳았으나 아들은 어려서 죽었다. 네 딸은 모두 출가를 하였고, 양자를 들여세웠다. 큰 딸 박용희(朴容喜 1928-)은 가평 이씨 이종태(李鐘台 1928-1990)과 결혼하였고, 둘째 딸 박용선(朴容善 1935-)은 공산 이씨 이덕범과 결혼하였고, 셋째 딸 박용구(朴容球 1937-)는 여주 민씨 민경덕과 결혼하였으며, 넷째 박용란(朴容蘭 1939-)은 최상진과 결혼하였다.★  


★ 가족사항
  큰 외숙 서정봉(廷鳳1901-1982)은 백부 서병석과 청주한씨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15세에 창녕성씨 백임(成百任1900. -1987)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범석(範錫1919-1982), 창석(昌錫1925-1998), 주석(疇錫1932- ) 세 아들과 딸 희석(姬錫 1929-)을 두었다. 서범석은 초취 풍양조씨 조돈혁(趙敦赫1917-1941)과 결혼하여 장남 길원(吉源1937-)를 낳았고, 재취로 덕수 이씨 이종례(李種禮 1925-)과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 성원(聖源 1952-), 필원(弼源 1955-), 홍원(弘源1958-), 흥원(興源1961-)이고 딸 인원(仁源 1949-), 의원(義源1961-), 헌원(憲源1965-)을 낳았다. 서창석은 나주정씨 정범희(丁範喜 1929-2000)와 결혼하여 3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 요원(堯源 1946-), 2남 순원(舜源 1952-)과 우원(禹源), 딸 예원(禮源 1949-)이다. 서주석은 평산 신씨 신영옥(申泳玉1938-)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에 용원(庸源 1959-), 기원(基源 1963-), 강원(康源 1965-), 딸 은호(銀浩1960-)이다.  서희석은 우봉 이씨 병건(李丙健 1928-1995)과 결혼하여 3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 기영, 한영, 호영과 딸 희영을 두었다. ★
  
★ 가족사항 어머니의 둘째 오빠는 서정기(廷麒 1906-1982)이다. 13살에 파평 윤씨 진희(辰姬 1904-)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장남은 서인석(徐仁錫 1928-)생으로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고등학교, 경기고등학교 국어교사를 지냈다. 둘째는 달석(達錫1939-)이다. 서인석은 창령 조씨 조영애(曺英愛 1931-)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으니, 제원(齊源 1951-), 준원(俊源1955-), 윤원(潤源 1958-)이고 서달석은 광산 김씨 김경중(敬中(1942-)과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으니 낙원(洛源1963-), 능원(능원1964-), 혜라(惠羅(1968-), 희정(姬晶 1971-)이다.  

  우리 어머니가 때어 나신 때는 1909년 9월 13일이었다. 자신의 생일은 어머님이 30여세 될 때까지 9월 14일로 알고 있었으나 할아버지께서 외갓집에 갔다 오셔서 네 생일이 13일로 기록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일을 제대로 찾게 되었다. 조선왕조가 1896년 대한제국으로 명칭을 고쳤으나 같은 왕정체제였다.
  조선왕조는 1392년에 건국된 후  519년간 지속되어 오다가 어머니의 나이 두 살 때에 1910년에 멸망하였다. 5백여 년간 왕조를 유지한 것은 중국에서는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장기간 지속된 왕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왕조가 세워지면 장기간 지속되었다.  고구려, 백제가 700여 년간 지속되었고, 신라는 1000년간, 고려가 474년간 지속되었다.

  조선왕조는 1904-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식민지로 급속히 전락되었다. 일본은 1905년 11월 소위 을사조약을 통하여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여갔다. 이는 외국의 간섭을 완전 배제함과 동시에 국가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민영환 등의 우국열사가 자살을 통하여 항쟁을 표하였고, 의병이 일어나고 반대운동이 크게 일어났으나 사세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나라의 주권을 상실한 것이었다. 이에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은 이위종, 이준, 이상설 세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게 하였다. 그 책임으로 고종이 퇴위되고, 아들 순종이 왕위에 올랐다.
  1907년 일본 통감의 통치가 실시되고 드디어 국가군대인 8,800명 마저 일본에 의해 해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국가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1910년 5월 마지막황제 순종이 폐위되어 대한제국은 멸망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또한 10여 년 전부터 온 민족에게 개화의 교육과 자주독립을 위한  계몽운동을 불러일으키던 우리의 모든 언론활동도 엄격하게 규제되어 막을 내렸다.  
  이에 나라의 독립을 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애국투사들은 자신의 가족과 재산과 모든 것을 버리고 해외로 망명하여 투쟁하는 고난의 길을 택하였다. 오랜 문화와 역사를 가진 나라가 외국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산다는 것은 독립투사들에게는 스스로의 마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독립투사들은 국가의 소중함을 겨우 10년 전에 깨닫고 교육을 통하여 민족국가를 건설하려고 온갖 힘과 정성을 바쳤던 우국지사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좋은 학문으로 알아온 유학에서 벗어나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여 개화와 교육을 통한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민족의 개화, 교육과 산업발전을 열렬히 강조하던 새로운 실천적 지식인들이었다.
  언론과 강연을 통하여 국민의 계몽을 하였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로 단재 신채호, 위암 장지연, 백암 박은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어려서 한문으로 된 유학 경전을 공부했다. 한문이 국가의 공식문자로 사용되던 오랜 전통이 개혁되어 우리말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국문자가 공식문자로 사용된 것이 1894년부터이다. 이들은 세상이 새롭게 변한다는 추세를 깨닫고, 유교식 지식을 과감히 탈피하여 새로운 개화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1894년의 갑오경장에서 조선왕조의 헌법과 같은 기능을 했던 경국대전의 법제가 폐기되어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한 신분제로 개혁되었다. 조선왕조의 양반, 평민, 노비가 법 앞에 차별되던 신분제가 해체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양반으로 승격되어 평등사회가 이루어졌다.
  이 때에 서재필 등에 의해 독립협회가 조직되어 순 국문으로 된 독립신문이 발간되어 국민의 눈을 뜨게 하였다. 세계의 소식과 개화에 대한 새로운 지식 정보를 제공함에 큰 역할을 하였다. 신문이 발간되어 지방에 퍼지면 여러 사람이 돌려 읽었다. 그리고 독자들이 의견을 쓰는 독자의 투고도 활발했다. 이어서 만민공동회의가 종로에서 개최되어 우리 역사의 최초의 민중집회가 시작되었다. 이는 민중의 힘이 정치에 반영될 수 있는 첫 시작을 보였다. 그리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한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계기는 국가의 자주독립이라는 엄청난 민중의 주장이 세론을 형성했다. 중국에 대한 사대를 포기하고 자주 독립을 하자는 것은 우리 역사상 엄청난 문화적 변혁이었다. 독립협회에서는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을 헐어내고 이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이제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전국적으로 불을 지폈다. 이런 운동을 애국계몽운동이라 칭한다. 이 운동이 활활 타오르게 된 것은 당시 지식인이었던 유학자 중 이런 추세를 재빨리 알아차린 위에 든 학자들이 동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우리 국민은 하나의 동포라는 민족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통하여 민족의 실체는 형성되어 왔지만 민족을 위한 정치는 아직 없었다. 그것은 민족 내의 신분적 차별이 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외국과의 전쟁을 당할 때에만 민족의식이 나타났고, 외침이 끝나면 민족의식은 정치의 수면 위에서 가라 앉아 나타나지를 않았다. 이 무렵부터 2천만 동포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근대의 국민적 국가, 자주적 독립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전 민족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즉 남녀 노소, 지역의 차이, 당색의 차이를 막론하고 전 민족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지방의 교육과 계몽을 위한 학회지가 줄지어 조직되고 학회지를 통하여 그리고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하여 전 국민의 개화와 자주 독립의식을 심으려는 운동이 전국에 산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이당시의 구호는 “개화”와 “자주”였으며,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당시의 교육은 사회 교육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개화의 필요성을 깨달은 사람이 한명만 있는 곳이면 서당이 사립학교로 변신을 하였다.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3000여개의 신식학교가 세워졌다. 우리 국민의 높은 교육열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근대화의 민족적, 전 국민적 노력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중단되었다. 이런 운동은 일본의 식민정책에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국지사들은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 조국을 떠나 해외로 망명을 해야 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인민은 이 땅을 버릴 수가 없어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조국에서 견뎌내야 했다. 나의 외갓집과 본집도 그 많은 민중의 한 집안이었다.    
  우리 어머님의 친정은 공주군 우성면 어천리였다. 어천리는 공주시의 북서쪽에 청양군과 경계지역이다. 어천리는 행정명칭이고 자연부락명칭은 여우 내라고 부르고 있다. 우성면은 1913년 12월에 일제에 의하여 전국의 행정구역에 대한 전반적인 통페합이 일어났을 때 우정면(牛井面)과 성두면(城頭面)이 합쳐져 개칭된 것이다. 이 때 어천리는 성두면의 건천리, 하어리, 금강 건너 현재의 탄천면인 반탄면의 소명리, 운암리, 현재 청양군 목면의 석화동(石火洞), 건천동(乾川洞)이 합쳐져 새로운 동명으로 개편된 것이다. 이 중 하어리(下漁里)는 18세기 영조 때에 편찬된 전국 군현별 지리서인 󰡔여지도서󰡕와 정조 때에 편찬된 전국의 인구통계서인 󰡔호구총서󰡕에는 어은동리(魚隱洞里)로 기록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여우내의 한자식 표현으로 생각된다. 어천리의 아래 마을 버든열을 특별히 아래 하자를 붙여 “하어리”로 칭한 점에서 여우 내는 원래 어은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어천리는 여우
내와 버든열 두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여우 내라는 명칭에서 어은동으로 한자 칭호가 생겼다고 해석된다.  


  여우내 마을은 남쪽, 북쪽, 동쪽이 산으로 둘러 쌓이고 겨우 서쪽이 트였다. 마을을 출입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서쪽으로만 나 있는 외길뿐이다. 아주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아늑한 마을이다. 이 동네는 1910연대 당시 40여호가 있었던 작은 마을이며 1970연대에 70여 호, 지금은 40여 호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공수원에서 흘러오는 내와 청양군 목면 안심리에서 흘러오는 내가 마을 서쪽 입구에서 합쳐지어 약 2킬로 정도 흘러 내려가 금강에 합쳐진다.  여우내에서 내를 건너면 몇 집의 외딴 집이 있는데 이 마을을 돌파골(석화동)이라 부른다. 마을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큰 정자나무가 서 있고, 그 정자나무 윗집이 바로 어머니가 태어나신 집이다. 이 집은 1901년에 외할아버지가 버든열에서 이 마을로 이사를 오신 후 지은 집으로 100년 정도 된 집이다. 그 후 둘째 외숙이 살았고, 현재는 넷째 외숙이 살고 있다. 이 동네에는 외할아버지의 사촌인 은진할아버지 댁과 단평할아버지 댁이 살고 있었다. 버든열은 달성 서씨의 동족촌으로 금강 가에 있다.  동·서·북 삼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였고 오직 남쪽으로만 길이 나 있고 그 앞에는 금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2.  불우한 유년시절

  어머니의 나이 두 살 되던 해에 나라를 잃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차지한 후 토지조사사업을 일으켜 막대한 국유지를 차지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나라가 망하기 전인 1912년 토지조사령에 의거, 조선민사령, 부동산등기령, 부동산증명령에 의거 1918년에 완료된 사업인데 부동산소유를  근대적인 방법으로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실제의 목적은 일제의 토지점유와 식민경제를 위한 목적이 주된 것이었다. 그 결과 많은 국유지와 미개간지가 일본총독부의 소유로 확보하여 일본 농장의 토지로 불하하였다. 한말에는 궁중의 토지가 전국에 둔토와 역토라는 명분으로 널리 있었고, 이는 실제 민유지에 조세권이 궁중에 있는 것도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또한 1908년 삼림법을 제정 공포하여 전국의 삼림을 국유화하였다. 이는 조선 왕조에서는 산은 공동의 재산이라 하여 소유권이 개인에게 있지 않은 것을 국가에서 확보하기 위한 조처였다.  또한 일제는 1911년 8월 총독이 제1차 조선교육령을 반포하여 일본어의 보급, 충량한 일본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과 저급한 실업교육 중심으로 노동력 착취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 결과 3000여개의 신식학교가 학교의 설비와 교원, 시설 등의 불비라는 이유를 들어 폐교 조처하여 690개만 남게 되었다.
또한  조선 총독부는 현역대장이 임용되어 헌병이 치안을 담당하는 무단 통치의 식민체제로 들어갔다. 그래서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초기 식민정책에 의하여 어머니는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 풍조는 딸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가정에서도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무관심 내지는 홀대 속에 자라게 되었다.
  1909년 조선민적법이 반포되어 실시된 것은 1911년부터이고 각 면에는 면사무소와 헌병이 치안을 담당하는 주재소(지금의 경찰 파출소)가 설치되었다. 이런 행정적 처리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1913년 12월에 전국의 군현명과 행정리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현재 행정구역의 골간은 이 때에 이루어졌다. 조선조의 두 개, 또는 세 개의 군현을 하나의 군으로 합치고, 면도 2-3개면을 합쳐서 하나의 새로운 면으로 고치고 행정부락도 대폭적인 정리가 이루어졌다. 1개 행정리에 종래의 5-6개 촌락이 합쳐졌다.
   어머님이 어렸을 때의 가정 형편은 다른 일반 사람에 비하여 넉넉한 편이었다. 논을 몇 마지기나 소유했는지 어머님의 기억으로 알 수 없지만 외할아버지가 마름(舍音)을 하고 있었고 머슴을 두 명이나 두고 있었고 큰 농우 두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마름은 조선 후기부터 나타나는 농장 관리인, 또는 농토 관리인을 말한다. 그 여우내 일대에는 외할아버지의 매부인 김종문 씨의 땅이 많았다. 김종문은 강경에 살고 있었으므로 공주군 일대의 소작인 관리를 외할아버지에게 맡겼다. 소작인은 논밭을 경작하여 그 수확물의 반을 지주에게 내야하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 마름의 역할이었다. 수확물을 거짓으로 보고하여 도조를 적게 내려하는 사람이나 게을러서 농사를 잘못 짓는 소작인은 마름이 그 경작권을 빼앗아 다음 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는 소작인에게 가능하면 후하게 하여 소작인들로부터 인심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마름은 중간 지주층이라 할 정도로 농촌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어머니가 10살 때였다. 1918년 5월 22일 늘 하던 대로 4살 먹은 여동생과 함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당숙 댁(단평 아주머니 댁)에 가서 놀고 있는데 집에서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 순간 어머니의 머리 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심부름을 온 사람이 헐레벌떡 숨이 가쁘게 왔기 때문이다.  3개월 전부터 외할머니가 병환으로 누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온식구의 식사를 짓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당시의 식구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큰언니 내외, 둘째 오라버니와 그해 3월에 시집온 올케, 그리고 3살 아래의 일곱 살 먹은 남동생,  네 살 먹은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 11식구였고, 머슴 2명까지 계산하면 13식구의 밥을 지어야 했다. 그리고 큰 농우 2마리를 먹이고 있어 집안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큰 언니는 1915년에 17살에 버든열에서 금강 건너편의 탄천면 송학리로 출가하였다. 외할아버지가 한문 선생을 모시고 양자간 자기 친아들 큰 외숙과, 그리고 둘째 아들, 이모부 세 사람을 놓고 독선생을 모시고 한문 교육을 시켰다.  


  어머니가 헐레벌떡 집에 와보니 안방에 식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 순간 큰일을 닥쳤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당시 10살의 어린 어머니는 사람의 죽음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외할아버지가 어머니 보고 “어미를 한 번 불러 보라!”고 하기에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엄니” 하고 불렀다. 외할머니는 힘겹게 감았던 눈을 사르르 뜨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미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였다. 그 눈가에 흐르는 눈물은 “너희 어린 3남매를 두고 차마 떠날 수 없다는 뜻과 내가 죽으면 동생들을 네가 잘 보살펴 주라는 당부의 말씀, 그리고 새 엄마를 얻으면 잘 받들고 살라!” 등 많은 사연이 함께 농축된 진한 눈물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았던 외할머니의 손이 스르르 놓여졌다. 집안 어른들이 그만 물러나라고 하여 물러섰다. 곧바로 외할머니는 다시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 운명하고 말았다. 1918년에 향년 39살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
  한 가정에서 안주인인 주부의 죽음은 그 집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오는 법이다. 외할머니의 죽음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10살 먹은 어머니였다. 새로운 집안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야 했고, 더구나 어린 두 동생을 보살펴야 했다. 즉 세 살 아래의 남동생 정룡이는 간질을 않고 있는 폐인이나 다름없는 중증 장애인이었고, 4살 난 여동생은 아무 것도 모르는 문자 그대로 철부지의 나이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석 달 전 2월에 둘째 외삼촌 서정기는 13살로 관(冠)을 썼고, 3월에 14살 되는 외숙모와 결혼을 하였다. 이는 가계를 이어갈 손을 보기 위하여 행하여지던 조선조의 조혼 풍습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새 올케인 둘째 외숙모는 파평 윤씨로 친정에서 한글을 배웠으므로 옛날이야기 책을 아침저녁으로 즐겨 읽으셨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지셨다.
  이해 3월 함께 살던 이모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서당 공부를 하던 이모부는 담배를 피우다가 훈장에게 들켜서 꾸중을 듣고 본가로 돌아갔다고 전하나 근본 원인은 외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점과 새 며느리를 맞이하는 집안 일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큰 이모부에게는 서당 교육을 그만 둔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모부는 다음 해(1919) 공주군 이인면에 있었던 이인심상소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학교를 다니어 졸업을 했다. 당시 심상소학교는 5년제였다. 그후 이모부는 곧 바로 충청남도에서 3명을 공채하는 금융조합 서기 시험에 합격하여 금융조합 서기로 취직을 하였다. 이모부는 후일 이인 금융조합 이사장으로 정년퇴임하였다. 큰이모와 이모부는 4녀를 낳고 막내로 아들을 낳았으나 곧바로 죽었다.  


외할머니의 탈상은 3개월 만에 치러졌다. 원래 조선왕조의 예법으로는 남편보다 먼저 죽은 부인의 경우 1년 상을 치러야 하였으나 나라가 망한 후라서 간편한 예법을 취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44살이었는데 그해 10월에 청양군과 접경지역에 있는 부여군 은산면에 살고 있던 18세의 처녀를 재취로 맞이하였다. 재취는 자기의 큰딸보다 2살이 아래였다. 이런 결혼이 가능했던 것은 외갓집의 경제력이 넉넉하였기 때문이었다.
  초례청에서 혼인식을 마칠 무렵 어느 집안 아저씨가 어머니에게 새엄마와 정들인다는 뜻에서 “ ‘엄니’라고 한번 불러보라”고 하니까 그 말은 들은 새 새댁이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고 한다. 자신의 처지가 안 되었음을 생각하여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쑥스러워서 새 새닥 보고 “엄니”라는 말이 성큼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계모의 성씨는 전주 이씨이고 이름은 화춘(花春)이다. 슬하에서 2남 1녀를 낳았으니 셋째외숙과 셋째 이모, 넷째 외숙이다.
★ 가족사항 셋째 외숙 정갑(廷甲 1921-1986), 외숙모 윤석표(尹錫杓1922-1976)와 결혼. 슬하에 네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아들은 원석(1943-1977), 귀석(?-    ), 민석(1961-), 이석(1961-)이고 딸은, 미혜,  서원석은 안동김씨 김수자(金秀子 1944-)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

★ 가족사항 셋째 이모  廷姬(1927-2001), 논산군 노성면 이모부 파평윤씨 세중(尹世重1922-)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철(1960-)이다. ★
  
★ 가족사항  넷째 외숙 廷壽(1934-) 외숙모 엄기옥(嚴基玉1939-)과 결혼.  슬하에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찬석(1963- ) 견석(1970- )과 세 딸(경혜, 순혜, 연미)을 두었다.★

  어머님의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는 아들들에게는 한문교육을 시켰으나 딸들에게는 공부시키지 않았다. 이모들이 모두 한글을 깨우치지 못했다. 딸들을 홀대하여 한글도 가르치지를 않았다. 또한 일제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는 학교 친구가 한 명도 없다. 어머니가 일생동안 가까이 지낸 사람은 집안의 인척이거나 이웃 집 사람일 뿐이다. 학교의 문턱을 밟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음악에 취미가 없어서 일생동안 즐겨 부르는 노래가 한 마디도 없었다. 어머니가 후일 외할아버지에 대한 불평으로 하는 말씀은 “어렸을 때에 한글이라도 깨우치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후일 어머니가 한글을 읽으시려면 ‘가’에 기억자하면 ‘각’이라고 떠듬떠듬 읽으셨다.
  어머니는 오직 집에서 밥 짓고, 빨래하는 가사를 돌볼 뿐이었다. 디딜방아를 셋이서 품앗이로 찧는데 하루에 보리 12말을 찧었다고 한다. 한 참에 네 말씩을  찧었다. 그러니 혼자 하루에 3말의 보리방아를 찧은 셈이다. 외갓집에는 동네 입구에 있는 물레방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이 많지가 않았기 때문에 가물 때에는 물레방아를 사람의 힘으로 찧는 디딜방아로 찧어야 했다.

** 3·1 운동
  어머님의 나이 11살 때에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조선총독부의 총독이 군인이 임명되어 헌병에 의하여 다스려졌으니 이를 무단 식민통치라고 칭한다. 삼엄한 군사 통치하에서 대한독립만세와 태극기가 신호탄이 되어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대한독립만세운동은 기차의 선로를 따라,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을 통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번져 나갔다. 기독교, 대종교, 불교, 가톨릭의 모든 종교인이 함께 참여하였고, 학생과 지식인, 민중이 참여한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대의 평화적인 민족운동이었다.
   3·1 운동이 일어나게 된 간접적 배경은 미국대통령 윌슨이 1918년 1차세계대전을 종결짓는 파리 강화회담에서 선포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미국대통령 윌슨은 당시 패전국의 식민지 국가들에게 각자 민족자결권에 따라 독립되어야함을 강조하였고, 이런 분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이런 세계적인 기운을 타고 우리도 독립을 쟁취하자는 논의가 민족지도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런 움직임의 시작은 2월8일 동경의 유학생의 독립선언서 제창운동이 국내 운동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되어 덕수궁에 유폐되었던 고종이 갑자기 1919년 1월 22일에 죽었는데 일본인이 독살했다는 풍문이 돌았고 이에 그 장례 날인 3월 3일을 계기로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즉 고종의 죽음과 일제의 혹독한 식민통치, 그리고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에 의하여 자각된 민족의식이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된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민족의 지도자 손병희 등 33인이 종로 탑골공원(지금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려다가 민중의 흥분으로 큰 사고가 날 것을 염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선어서를 낭독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지었고, 공약3장은 한용운의 작품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기독교, 천주교, 불교 계통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참여한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즉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위기를 닥쳐서는 종교인들이 화합하는 역사적 전통을 살린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사전에 조직적으로 준비되지 못했다. 학생을 통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었고, 오직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는 구호가 사전에 연락되지 못한 군중을 결집하고 운동에 끌어 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3·1 독립만세운동은 3월에서부터 8월말까지 전국 218개 군  중 211개 군에서 참여하였고, 1500여회에 걸쳐서 운동이 일어났으며 연인원 200만명이 참가했으니 당시 총인구 2000만 중 10분지 1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셈이다. 3·1운동은 지금까지의 역사상 전에 없던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 특히 평화적인 민족운동이었으나 헌병의 발포와 구타 등으로 일부 폭력화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한 일본측의 저지는 무자비했다.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만행사건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4월5일 발안 장날 제암리 청년들이 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리니 헌병들이 심한 매질을 하여 많은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그러나 밤마다 제암리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니 지역주민들의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4월 15일  보병 제78 연대 소속 아리타 중위 등 30여명이 몰려와 전일· 심한 매질을 사과하겠다고 15세 이상 남자 신도를 교회로 모이게 하였다. 21명의 신도가 이를 곧이듣고 모이자 헌병들이 나가 밖에서 출입문에 못질을 하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고 총을 쏘아대었다.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두 아낙의 목을 베어 볏짚을 쌓아 불을 질렀고, 마을 민가 32채를 불질러 모두 태웠다. 조선인은 누구도 이를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4월 17일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유해를 수습하여 공동묘지 입구에 묻었다. 1982년 이곳의 발굴작업에 의해 안장되었으니 사적 제299호 제암리삼일운동순국유적지이다.
  또 하나의 만행사건이 유관순 열사의 경우이다. 유관순은 현재 천안시 병천면 탐원리에서 1904년에 태어나 1916년 기독교 감리교 공주 교구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도움으로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입학하여 1919년 고등과 1년생이었다.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휴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학교를 찾아가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권유하여 연기, 청주, 진천의 교와 유림계를 규합 음력 3

Prev
   업적 계량주의에 자진 편승한 속물적 근성 [1]

권중달
Next
   감사합니다....

류인걸


Copyright 1999-2026 Zeroboard / skin by Sty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