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18 15
  View Articles
Name  
   권중달 
Subject  
   한국에서의 중국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오는 2005년 6월 11일부터 14일 까지 북경에서 한국과 중국 학자간의 학술회의가 있습니다. 장소는 북경에 있는 사회과학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명이 가는데, 저는 우리나라에서 중국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그 요약본입니다.

韓國에서의 中國學 硏究의 現況과 展望

                權        重        達(中央大 史學科 敎授, 韓國史學史學會 會長)

1. 韓國에서의 中國學이란?

韓國에서의 中國學이란 무엇일까?
첫째로 硏究의 主體는 韓國 안에 居住하는 韓國 사람이고, 둘째로 그 對象은 中國地域에서 이룩한 人文學的 成果를 대상으로 한 것이며, 셋째로 그 內容은 傳統的 意味에서 人文學인 文學과 史學 그리고 哲學에 관한 硏究 成果일 것이다.
그러나 有史 이래로 韓半島와 中國大陸과의 關係는 地域的으로 대단히 가까이 있었던 關係로, 文化交流를 持續하여 왔기 때문에 韓國의 歷史 全體에 걸쳐서 中國에 대한 關心은 한번도 줄어 든 時代는 없었으므로 이 긴 期間에 中國에 대한 硏究를 모두 다룰 수는 없고, 近代的 學問에서 말하는 地域學의 차원에서 中國學을 擧論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限定한다면 本 論文에서는 20世紀 初부터 다루어야 할 것이지만 20世紀 初에서부터 西勢東漸과 日本의 침략이라는 時期를 거치면서, 傳統的인 漢學은 斷絶되었고, 근대적 地域學의 개념은 나타나지 않은 시절이 있었으므로 이 時期를 除外하고 결국 韓國에서 地域學으로서의 中國學은 2次大戰이 끝난 時點인 1945년 이후부터 살펴 볼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1945년 이후 특히 南韓에서 있었던 中國이라는 地域을 對象으로 한 學문을 가지고 살펴 볼 것이고, 이 기간에 中國地域을 대상으로 한 硏究의 現況과 앞으로 발전할 展望을 보려고 하는 것이 主題가 된다.

2. 2次大戰 후 中國 硏究의 出發條件

學문硏究가 純粹한 學問的 관심만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냐의 問題는 개인별로 다를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學問 硏究도 歷史的 環境의 影響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韓國에서의 中國學 硏究가 시작되는 2차 世界大戰이 끝나고 일본이 韓半島에서 물러갔던 시점에서 보면 韓國사회에서는 中國地域에 관한 硏究를 進行하기에는 대단히 불리한 條件이 조성되어 있었다.
첫째로 硏究 人力이 충분히 마련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日帝强占期에 일본은 韓國인 硏究자를 기르려는 政策的 意圖와 그 환경이 마련되지 못하였다. 終戰 후 韓國사람 가운데 中國學을 硏究할만한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의 숫자가 아주 적고 또한 그 硏究方法이나 視角도 일본 중심으로 敎育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 의하여 中國學 硏究는 시작된 것은 다행이지만 質과 量에서 혹은 硏究方向에서 그 결과에 큰 期待를 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둘째로 現實的으로 中國에 대한 관심을 가질 條件이 형성되지 아니하였다.
2차 대전 이후에 세계는 冷戰體制 속에 있었고 더욱이 1950부터 3년간 진행된 韓國戰爭은 中國大陸과의 왕래 자체가 犯法行爲가 되는 시절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中國大陸과 韓國은 피부로는 전혀 別個의 地域으로 느껴졌고, 갈 수 없는 아주 먼 나라였던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敵對的 關係에 놓여 있는 나라였으므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中國에 대한 관심을 갖기는 대단히 어려움이 되고 있었다.
셋째로 排他的 民族主義의 경향은 中國學을 疏外시켰다.
韓國에서는 외국인 일본의 침략을 받고 植民統治를 받았던 가까운 過去를 늘 想起하면서 日帝時代에 獨立運動 차원에서 강조되었던 民族主義 강조되었고, 이 民族主義는 語文政策에서 한글 專用政策으로 나타났고, 敎育現場에서 中國學을 하기 위한 기초지식으로서의 漢字․漢文敎育이 妨害받거나 斷切되어서 새로 敎育받은 世代 가운데는 漢字文盲의 숫자가 대단히 많게 되었다. 이것은 韓國에서 中國學 硏究를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많이 잃은 것이다.
넷째로 中國學이 속한 人文學을 공부하기가 어려울 만큼 經濟的으로 어려웠다.
韓國은 일제時期에 일본이 전쟁을 위하여 물자를 동원하여 가서 經濟的 기반이 脆弱한데다가 韓國戰爭 3년간은 韓國을 극도로 疲弊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學問도 실용성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中國學이 속한 人文學은 실용적인 學問이 아니었다. 따라서 中國學에 관심을 갖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3. 純粹 人文學으로서 初期의 中國學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2차 대전 후에 韓國에서 中國學을 硏究할 수 있는 條件은 最惡의 狀態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人文學으로서의 中國學이 싹틀 수 있는 환경이 존재 하였다.
첫째로는 學校의 설립에 따른 敎科敎育 내용 속에 中國에 대한 講義가 들어가 있었다.
2次大戰 후에도 韓國에서는 初中等과 大學敎育의 필요성이 제고되었고 公私立 學校가 속속 設立되었다. 이러한 學校에서 敎科課程 안에 자연스럽게 中國에 관한 內容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교과과정 속에 포함된 人文學 가운데서 꼭 들어가야 하는 동양學에는 일본에 대하여서는 敵對感情이 있어서 排除되고, 東南亞와 印度地域에 대하여서는 硏究자가 너무 적어서 개설하기가 어려웠으므로 韓國과 中國의 오랜 關係에서 中國에 대한 교과과정이 많이 포함되었다.
둘째로 韓國學의 강조가 中國學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韓國에서의 民族主義와 愛國心 등이 韓國學을 강조하였지만 韓國學을 硏究하는 수준이 제고됨에 따라서 韓中歷史關係 때문에 자연스럽게 中國에 대한 관심을 보에게 되었다. 즉 비록 정치적으로는 왕래가 불가능하여 中國에 대한 관심이 적었지만 韓國學 硏究가 深化되기 위하여서는 中國學의 硏究가 불가피하였고, 이것이 中國學을 硏究할 수 있는 觸媒役割을 하였다고 하겠다.
셋째로 純粹 人文學者들에 의하여 中國學 硏究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 되었다. 비록 적은 規模이기는 하지만 中國史를 전공하는 교수 31명으로 구성된 東洋史學會가 1966년에 創設 되었고 이들은 순수 人文學的 관심에서 中國역사를 硏究하는 사람들의 學會였다. 그리고 꾸준히 省察과 反省을 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은 文學이나 哲學分野에서도 비슷하였다.
넷째로 中國文學과 哲學 歷史를 硏究하려는 사람들이 臺灣地域으로 留學을 떠났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경제적으로 약간씩 회복하는 幾微가 있었고, 이를 배경으로 어렵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臺灣으로 留學을 떠났다. 후에 中國學 硏究의 中樞的 역할을 擔當할 사람들이 1970년도 초기에 臺灣에 留學하고 있었는데 그 수는 30명 정도였다.

4. 中國學의 발전의 契機를 가져온 環境의 變化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韓國에서의 中國學은 본격적으로 그 硏究의 胎動을 시작하였다.
첫째로 韓國의 敎育政策의 變化이다. 韓國정부는 首都圈의 人口 分散과 大學 發展이라는 두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旣存大學의 分校設立과 새로운 大學의 設立을 적극 獎勵하고 支援하였다.
大學을 확장하면서 人文學分野의 專攻을 설치하게 되는데 여기에 中國學과 관련된 學科가 대단히 많이 설치되었다. 많은 大學에서의 中國관련 學科의 설립은 敎授要員을 필요로 하였고, 中國을 공부하는 學生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時期에 1970년대에 臺灣에 留學하였던 사람들이 정식으로 硏究者로써 활동할 수 있었다.
둘째로 國際的으로는 冷戰體制의 종식이었다. 中國과 美國의 핑퐁외교와 國交의 樹立은 韓國人들에게 中國은 過去처럼 갈 수 없는 나라가 아니라는 認識을 심어 주었다.
셋째로 韓國에서 열린 88올림픽은 冷戰體制를 終熄시킨 스포츠행사였고, 이 때에 中國에서 學者 31명이 최초로 韓國을 방문하고, 韓國의 學者와 交流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그 1년 뒤에는 韓國學者들이 ‘孔子誕生2540周年 紀念國際 學術大會’에 正式을 30여명이 참석하여 論文을 발표하여 한중 學術交流의 길이 열렸다.
넷째로 中國이 改革開放政策으로 韓國 企業家와 觀光客이 대거 中國을 訪問하기 시작하였다. 1992년 韓中外交關係가 수립되었고, 中國에서는 적극적으로 韓國企業을 誘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中國으로 관광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이러한 사회적 雰圍氣는 中國에 대한 關心을 提高하였고, 이것은 자연히 中國學 硏究의 地盤이 되었다.
이러한 條件들 때문에 韓國에서의 中國學이 발전할 수 있는 土臺는 飛躍的으로 발전하였는데, 예컨대 2004년까지에는 中國과 관련된 學科를 설치하고 있는 大學은 전국적으로 106개 교이고, 2년제의 專門大學에도 28개의 學校 설치되었고, 卒業生은 한해에 약 5천 명 정도가 배출되고 있었다.
또 大學의 史學科와 哲學科가 2004년까지 全國的으로 각기 50곳에만 設置되어있는데, 이곳에서도 全體 敎科課程의 4분의 1 정도를 中國 관련 講座를 受講하고, 卒業하는 學生數가 史學科 2천 명, 哲學科 1,200명이다. 그리고 만약에 文史哲을 합쳐 본다면 大學에 中國關聯 學科는 전체적으로는 230여 개가 설치되었고, 그 卒業生도 연간 8천 명 以上이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中國語 關聯學과의 증가는 같은 人文學에 속한 史學科와 哲學科가 2004년까지 전국적으로 각기 50곳에만 설치되었고, 이곳에서도 전체 敎科課程의 4분의 1 정도를 中國 관련 講座를 受講하고 졸업하는 學生數가 史學과 2천 명, 哲學과 1,200명에 비하여 본다고 하여도 대단히 많이 增加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文史哲을 합쳐 본다면 大學에 中國관련 學科는 全體的으로는 230여 개가 설치되었고, 그 卒業生도 연간 8천 명 以上이 된다고 하겠다.

5. 學問的 成果의 增加

앞에서 말한 환경의 변화는 中國學 硏究 成果를 劃期的으로 向上시키고 있다.
첫째로 大學에 中國 關聯學科의 설치의 增加는 硏究者를 겸하고 있는 敎授의 增加를 가져왔다. 中國關聯 敎授의 增加는 安定的으로 中國學을 硏究하는 人員을 增加시킨 것이다.
둘째로 韓國大學에서는 敎授에 대한 평가 작업을 하고 있다.
韓國 大學에서는 최근 10년 전부터 각 大學에서 교수에 대한 평가를 시작하였고, 그 評價 項目 가운데 論文業績이 가장 중요한 部分을 차지하게 되자 敎授들은 좋은 評價를 받기 위하여 보다 더 적극적으로 硏究物을 내려고 하였고, 中國學 關係 敎授들도 마찬가지로 硏究業績을 내는데 좀더 積極的으로 變하게 되었다.
셋째로 韓國政府는 硏究業績을 더 많이 쌓기 위하여서는 硏究者들에게 보다 大大的으로 硏究費用을 支援할 필요를 認識하였고, 이에 따라서 韓國學術振興財團을 설립하고 硏究者에게 硏究費를 支給하는 制度가 劃期的으로 改善하였는데, 中國學 關係 교수들도 다른 분야의 硏究자와 동등하게 이 制度에 의거하여 硏究費를 신청하고 그 硏究費로 硏究에 매진하는 풍토가 마련되었으므로 中國學 硏究 成果物이 大量으로 증가할 수 있는 여건이 造成되었다.
이 硏究餘件은 계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는데, 예컨대 學術振興財團의 경우를 보면 최초로 시행한 大規模의 計劃은 지난 2002년부터 금년까지 3년 기간이 끝나고 다시 5개년 計劃이 수립되었는데 그 豫算은 向後 5년간 총 8,000億원을 投入하도록 되었고 이는 1차보다 다시 劃期的으로 개선된 것이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硏究者의 숫자를 대대적으로 증가시켰다. 증가한 硏究者의 숫자를 정확히 통계적으로 說明하기는 어렵다고 하여도, 韓國에서 가장 오래된 中國學硏究學會 가운데 하나인 韓國中國學會의 會員이 2005년도를 기준으로 약 1,300명인 점을 勘案한다면, 이 學會에 가입하지 않은 中國관련 硏究者를 합친다면 대략 2천명 내외가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예컨대 1966년에 硏究者 31명이 모여서 學會活動을 시작한 東洋史學會의 경우에 그 회원의 숫자도 늘어 갔지만 그 안에 中國關聯 學會로서의 分科學會가 中國古代史學會, 魏晉隋唐史學會, 宋遼金元史學會, 明淸史學會, 中國近代史學會 등 다섯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中國관련 學會도 많은 學會로 分化하였다.
또 關係論文을 발표할 수 있는 學報의 숫자도 크게 증가하였다. 각 大學의 中國 關聯學科에서 發刊하는 學報가 100개의이고, 學會도 최소한 30개라고 본다면 적어도 년 간 50개 이상의 學보가 발간되고 그 論文의 수는 매년 350篇程度이다.
中國關係 논저의 숫자를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韓國東洋史硏究者論著總目錄》와《現代韓國歷史學論著目錄》을 가지고 보면 1980대까지 35년간의 歷史學關係의 論文目錄은 1,700개인데, 그 후 1998년까지 18년간의 업적이 그와 맞먹는다. 즉 1980-년 이후로는 그 이전보다 倍나 많은 硏究結果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6. 向後 中國學 硏究의 課題

中國學 硏究는 비록 前 時代보다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다른 分野와 比較한다면 아직은 改善해야할 부분이 많다.
첫째로 같은 期間을 두고 韓國學과의 硏究 成果를 比較한다면 약 6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中國學에서 다루어야 할 空間과 시간을 韓國學에서 다룰 시간과 공간과 比較한다면 韓國 內에서의 中國學硏究의 성과는 韓國學의 20분의 1정도에 머문다고 할 것이다.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기도 하지만 순수한 人文科學의 視角에서 본다면 이것은 심한 不均衡이라고 할 것이다. 즉 民族主義 이데올로기가 中國學 硏究를 방해하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中國學을 西洋學에 比較한다하여도 中國學은 대단히 적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中國관련 學會와 硏究論文 사이에는 아직도 相互交流를 통한 통합된 中國學이 나타나고 있지 않으므로 이를 총체적이고 有機的으로 理解하는 것을 指向해야 한다.
                        끝

Prev
   북경에 다녀 온 이야기 [2]

권중달
Next
   스승의 날입니다.. [2]

정창원


Copyright 1999-2026 Zeroboard / skin by Sty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