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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중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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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 서술에서 정통의 문제
중국사 서술에서 정통의 문제

                                권        중        달(중앙대 사학과 교수)

1. 정통성의 중요성과 정통론들

正統論이란 왕조 혹은 제왕의 계승관계가 존재할 때에 나타나는 논리이다. 제왕이 아니었던 사람이 새로이 제왕이 되고, 또 왕조를 건설하면서 앞에 존재하였던 제왕 혹은 왕조를 정당하게 계승하였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보통 單線的으로 왕조가 이어질 경우에는 대체로 문제가 없지만 앞의 왕조를 계승하려는 세력이 병존하게 될 때에는 특히 이 정통론이 심각한 영향력을 가지고 등장하는 것이다. 중국 역사 속에서 왕조를 건설하고 稱王, 혹은 稱帝한 경우는 무수히 많고 이들은 각기 전 왕조나 제왕을 이어받으려고 경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계승의 정당성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끌어가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 정통론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예컨대 전국시대부터 秦末의 통일 과정을 거쳐서 劉邦이 다시 통일할 때까지만 보더라도 똑같이 칭왕한 제왕들이 동시에 존재 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즉 전통적으로 칭왕을 하던 유일한 왕조인 周나라에 威烈王, 安王, 烈王, 顯王, 愼靚王, 赧王 등이 있던 시기에 종전에 제후국이어서 그 主君을 公이라고 불리던 楚 나라에는 聲王 등 悼王, 肅王, 宣王, 威王, 懷王, 頃襄王, 考烈王이 있었고, 魏나라에는 惠王 등 襄王, 昭王, 安釐王이 있었으며 齊나라에는 威王 등 宣王, 湣王, 襄王이 있었고, 秦나라에는 惠王는 武王, 昭襄王, 昭襄王이 있었고, 燕나라에도 易王 등 昭王, 惠王, 武成王, 孝王이 있었고, 宋나라에는 康王이 趙나라에도 武靈王,惠文王, 孝成王이, 韓나라에는 宣惠王, 襄王, 釐王, 桓惠王이 각기 일정한 영토를 가지며 스스로 그 칭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 주나라가 멸망한 BC 256년 이후에는 후에 6국을 통일한 秦나라에 昭襄王, 孝文王, 莊襄王을 거쳐서 政王이 始皇帝를 칭할 때까지에도 楚나라의 考烈王, 幽王과 魏나라의 安釐王, 景湣王, 그리고 韓나라의 桓惠王과 趙나라의 孝成王, 悼讓王, 幽繆王, 代王 그리고 燕나라의 孝王이 병존하여 존재하면서 각기 칭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진 2세황제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칭제한 사람은 없었지만 실제적으로 독립적 왕권을 행사하였던 세력도 張楚王 陳勝, 楚懷王, 趙王 武臣, 齊王 田儋, 燕王 韓廣, 魏王 魏咎, 韓王 韓成이 있었고, 후에 漢 나라의 황제가 된 유방이 漢王일 시절만 보아도 똑같이 제왕을 칭한 사람은 秦의 嬴嬰, 楚 義帝, 趙王 趙歇, 齊王 田福, 田橫, 燕王 韓廣, 魏王 魏豹, 韓王 韓成,西楚 霸王이 있었는데 어느 누구도 자기의정당성을 부인한 사람은 없었다.
이처럼 칭왕 혹은 칭제한 사람이 병존하여 세력 다툼을 하고 있을 때에 칭왕 혹은 칭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그 정통론은 아주 다양하다. 만약에 그 정통론이 많은 사람에게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전체를 통일하여 나가는데 대단히 유익한 선전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통일을 성취한 뒤에라도 이 칭왕 칭제의 정당성이 논리적으로 인정된다면 제국의 안정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즉, 당시의 다른 사람들이 그 왕조나 새로이 칭왕 혹은 칭제한 사람에 대하여 온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왕조의 유지와 칭왕, 칭제한 사람의 안정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역대 중국의 제왕이나 이를 보좌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여러 논리로써 정통론을 개발하여 왔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새로운 왕조 혹은 제왕의 등장이 하늘의 뜻임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하늘을 일단 절대자라고 생각하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에 비추어 볼 때에 하늘이 자기 왕조의 등장을 알리고 지시하고 지지하였다는 말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하늘의 뜻<天命>을 받는다면 자기에게는 등극의 정당성이 있고 따라서 올바르게 이어받았다는 의미의 정통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天命論만으로 우주질서의 순리에 맞추어 등장하였다는 사실을 설득시키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우주의 변화원리로서의 五行論으로 자신의 등장을 합리화 하는 경우가 나타나는데, 그것도 상황에 다라서 相生논리에 의하여 설명하기도 하고 相剋논리에 의하여 설명하기도 하여 보다 근접한 설명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천명론은 그 진위를 판가름 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없기 때문에 권력을 잡은 사람은 억지로 기이한 현상<天氣>이 나타났다고 僞造하면서까지 설명하려고 노력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막연한 우주질서와의 연관성 위에 다시 血統論을 첨가하여 설명하려고 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살던 사람이면 누구나 제왕으로 혹은 성왕으로 인정하는 전시대의 사람과의 혈통적 연계성을 강조하며 자신의 등장이 당연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도 있게 마련이었다. 이 경우에도 대체로 필요에 의하여 그 혈통 관계가 조작될 가능성을 얼마든지 존재하였던 것이다.
또 중국인들이 이상적인 제왕의 승계라고 여기는 禪讓방법을 추가하여 제왕의 승계를 정통의 기준으로 보려는 경향이 생기었다. 그러나 원래에 禪讓이란 선양을 하는 사람이 주도적으로 선양받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인데도 후대에 이 방법을 원용한다고 하면서 강제적으로 선양의 의식을 시행하게 하여 이른바 傳國寶 혹은 傳國璽라는 것을 받았던 것이다. 실제로는 원래의 뜻을 정면으로 배치한 것이었지만 형식으로는 순서를 갖춘 것이었다.
이렇게 정통의 조건에 억지로라도 맞추어 왕조건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통성을 갖는다는 것은 통치행위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역대 모든 왕조와 제왕은 각기 스스로의 정통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선전하여 왔다.

2. 역사가에게 판단이 맡겨진 왕조 정통성

왕조를 세운 당사자나 제왕된 사람은 각기 자기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같은 시대에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둘 이상이 될 경우에는 그것을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이 경우에 병존하는 여러 왕조<제왕> 가운데 누구를 정통으로 인정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의 몫인 것이다.
최초의 역사가로 알려진 공자는 그의 《春秋》에서는 사실의 옳고 그름을 褒貶하여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중서의 《春秋繁露》 첫머리에 나오는 바대로 같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에 따라서 포폄하였던 것이다. 즉 楚 莊王이 陳의 夏徵舒를 죽인 것과 靈王이 齊나라 慶封을 죽인 것을 그 폄하하였지만 그 정도를 달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공자가 쓴 《春秋》에서 사용하는 말씨로 ‘이미 분명한 것은 기록하지 않고,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을 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고 이러한 방법으로 결국의 君臣의 문제, 尊卑의 질서를 판단하여 기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과거 인간의 행동을 놓고 정당성 여부를 판단한 것이었다.
漢代에 와서 사마천은 그의 《史記》에서 공자적 포폄론을 수행하지 않고 객관적인 역사기록을 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本紀와 列傳을 구별하여 제왕으로 인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項羽를 실제로 황제<물론 황제라는 용어가 나타난 이후>의 자리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음에도 本紀에 넣고 있다. 또한 諸侯를 기록하는 世家에 孔子를 넣고 있어서 또 다른 포폄을 하고 있는 것이다.
班固는 《漢書》를 저술하여 漢왕조 중심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따라서 한왕조가 모든 기록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유방과 동시에 천하를 쟁패하였던 항우는 결과적으로 졌다는 사실 때문에 陳勝과 묶어서 열전의 첫 권에 싣고 있다. 이것은 항우를 본기에 넣은《史記》와 달리 진승과 함께 세가도 아닌 열전에 넣고 있어서 역사가로써 항우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한편으로는 인물이나 왕조에 대하여 무엇인가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한 것이고, 그러한 점에서 왕조의 정통성이나 한 인물의 정통성 여부란 당사자의 생각이나 희망에 의거하여 결정되기 보다는 기록자인 역사가에 의하여 裁斷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과거 사실에 대하여 正이냐 아니냐, 本<중심적 인물>이냐 末<부수적 인물>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실제로 그 후로도 계속되어서 결국, 한마디 貶下하는 글을 ‘목에 斧鉞을 대는 것보다 더 두렵고, 한 마디의 褒賞은 곤룡포보다 영광스럽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가의 역할을 인식하게 되고 나서부터는 많은 역사가들이 나타났다. 특히 중국의 전통적인 四夷觀的 시각에서 五胡의 등장과 강력한 왕조의 건설, 그리고 전통적인 왕조를 건설하였던 세력의 남하라는 위진 남북조 시대에 오면, 정통성의 싸움은 더욱 치열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이에 따른 역사가의 역할 또한 정치적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과거에 대한 평가의 권한이 역사가에게 주어진 사실을 알게 된 권력자는 자기 스스로가 정통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만들어 내는 일과 더불어 그 평가기록 자체를 자기의 권력 하부구조에 두려고 시도하였고, 그것으로 唐代 이후에 官撰史書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 정통성의 문제는 정통론을 만들어 내는 사람과 이를 판단하여 기록하는 사람을 동일하게 만들려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자는 당대의 사실을 꾸준히 기록해 나가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기록을 가지고 자기 왕조의 등장을 합리화하는 방법에 맞추어 기록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또 私撰이라고 할지라도 절대권을 가진 황제 지배 하에서는 역사가 자신도 결국 欽定을 통하여 역사책의 정당성은 황제에게서 인정받으려는 경향을 띄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북사》를 지은 李延壽는 자기의 원고를 ‘금고석실에 넣어 두기를 바랐던’ 사마천의 필법을 모방하였다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하나하나를 國子祭酒인 영호덕분에게 감수를 받았고, 황제의 흠정을 받아서 유포하였던 것이다.
이제 역사의 관찬제도와 그러한 관심을 가진 황제가 존재하는 체제 아래에서는 정통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역사가의 몫에서 권력자의 손으로 다시 옮겨진 셈이었다.

3. 객관적 역사서술의 태도와 정통론의 문제

제왕이나 왕조가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올바르다는 주장이며, 동시에 그러한 필요성을 가진 당시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가가 어떤 왕조나 제왕을 정통으로 기록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도 결국은 기록대상 왕조가 실제로 정통성이 있느냐의 여부보다도 기록자의 생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많은 이론이 개발되었지만 결국은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람과 그 보좌하는 사람이 그때그때 자기에게 유리한 이론을 만들거나 유리한 이론을 원용하였던 것이다. 결국은 통시대적으로 적용되고 모두가 인정하는 절대적인 정통이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기록자가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보아 정통성에 대한 이론의 여지가 없을 때에는 정통론을 통한 시비는 발생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즉 객관적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시대에 오면 오히려 종전에 존재하였던 정통론조차도 객관적 입장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가 송대 중엽의 사마광의 《資治通鑑》에 나타나 있다.
순전히 역사 사실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어서 이념으로 국가를 이끌어 가려 하였던 왕안석의 新法黨을 반대하였던 사마광은 대체적으로 그동안에 나와 있는 정통론에 대하여 부정적인 회의를 던지고 있다. 그는 ‘五德論은 秦이 분서갱유한 것 때문에 秦을 閏位로 넣고자 한 漢代의 所産이었고, 華夷論도 公論일 수가 없고, 正邪論도 절대적 기준으로 삼기 어렵고, 中原地域論도 문제가 있으며, 繼承論<선양의 모방>과 血統論도 확정할 수 없는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정통성을 만약에 인정한다면, ‘萬國을 합하고 그곳에서 군주가 되어 법도를 세우고 호령을 반포하는데도 천하사람 가운데 아무도 감히 그것을 위반하지 못할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구체적인 상황이 왕도를 베풀었느냐 아니냐에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다만 《자치통감》을 서술하면서 어쩔 수 없이 紀年의 필요성 때문에 전왕조의 계승성에 무게를 두어 결정하였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마광의 태도에 대하여 다시 100여년이 지난 다음에 남송시대를 살았던 朱熹는 金 왕조의 압박 하에 놓여 있었고, 남송의 정통성을 위협받을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 되었을 때에 혈통론에 의거하여 촉한정통론을 세워서 역사 사실을 관념적으로 파악하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陳壽의 《삼국지》가 魏 중심의 역사였던 것을 《資治通鑑綱目》을 통하여 蜀漢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다시 원대에 《송사》의 편찬문제와 《요사》와 《금사》 편찬문제가 토론 되었지만 명대에 이르러서 왕조의 정통문제는 잠잠하였다. 만주족이 남하하는 시대를 살았던 왕부지는 만주족의 남하는 만주족을 위하여서도 불행한 일이라는 것을 역설하였지만 정작 정통론에 대하여서는 명확한 뜻을 전하지 않았다.

4. 결론 - 정통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통론의 문제는 현실 왕조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온갖 권력과 논리를 동원하여 정통 판단자인 역사가를 자기 하부구조에 넣고서 그 統, 즉 승계의 정당성을 강조하게 하려는 我田引水的 논리를 펼치었다. 그러나 권력이나 주의, 이념의 하부구조에 머물기를 거부한 역사가는 정통론에 회의적이었다.
만주족의 청왕조가 남하 과정에서 반청무장운동까지 벌였던 王夫之조차 명확한 정통론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즉 그의 서론에서 ‘논의하다가 정통에까지 이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자문하고서, ‘정통을 말하는 논리를 보아도 그것이 스스로 밝힌 것을 알지 못하겠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로 ‘漢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曹氏와 司馬氏가 이 기회를 틈 타가지고 천하를 훔쳤는데, 계승하는 절차를 밟았다는 이유로 禪讓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것은 찬탈의 흔적을 뒤덮으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역사를 대상으로 하여 정통성을 분별하려고 하는 행위는 만고불변의 정통론이 존재하여 이것에 의하여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 정신과 이를 근거로 한 각기 시대별로 자기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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