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원고를 청탁해 왔다. 신임교수들의 문화나 태도에 대한 선배교수로서의 글을 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뀌는 세월을 따라가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른릅니다. 하여간 여기에 그 원고를 소개 합니다. 교수신문에서는 4월 17일자로 실린다고 합니다.
업적 계량주의에 자진 편승한 속물적 근성
매 학기가 되면 대학에도 식구가 조금씩 바뀌어서 신임교원이 들어오고, 정년 교원들은 물러난다. 이렇게 물 스며들 듯이 조금씩 바뀌는 것도 세월을 쌓다 보면 한 세대가 지나고 다음 세대로 완전히 교체 된다. 이렇게 조금씩 변하는 세월을 30년 동안 대학 캠퍼스에서 살아가는 것이 대학교수이다.
그래서 대학사회는 항상 2·30년의 격차를 가진 세대가 공존한다. 특히 문명 발달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세대 간의 격차도 변화의 속도가 큰 만큼 커져서 대학 내에서 같이 근무하는 교수 사이에서도 2·30년의 차는 이해의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몇 년 전이다. 신임교수가 왔는데,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까 몇 년을 지나도 선임교수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한번은 이 신임교수와 선임교수가 공교롭게 교정에서 자동차 접촉사고가 있었는데, 피차에 교수인 것은 알아보지 못하였다. 급기야 큰 소리가 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피차 한 캠퍼스에 근무하는 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망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신임교수는 몇 년간 계속 우수교수로 뽑히어서 특별연구비로 받는다는 것이다. 하기야 요즈음은 매년, 매학기 논문을 체크하여 승급도 시키고, 연구비도 지급하며, 연구논문의 숫자가 교수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으니 주변의 상황이 어떠하든 자기 연구에 열정을 보내면 우수한 교수로 불릴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배 교수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전 같으면 같은 대학에 있는 선임교수들을 일부러라도 찾아뵙는 것이 관례인데, 아무리 개인주의가 만연해도 몇 년 전에 왔는데도 피차 모를 정도로 연구실에만 쳐 박혀 있을 수가 있느냐 하고 혀를 차는 것이었다.
선임 교수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또 하나가 업적 부풀리기이다. 몇 년 전에 교수 업적을 심사하다가 이해가 잘 안 되는 경험을 하였다. 어떤 분이 제출한 연구업적은 누가 보아도 통계로는 대단하였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박사학위 논문을 장별로 개별 논문으로 만들어 서너 개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것을 다시 모아서 단행본으로 묶어서 이를 모두 제출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박사학위 논문 하나와 논문 네 편, 그리고 저서 한권이라는 업적이 된 것이다. 이는 박사학위 논문 한 개를 가지고 그 세배의 업적으로 부풀려 제출한 셈이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그것을 다듬어서 논문을 만들고, 다시 종합하여 한권의 저서를 만드는 것은 학자라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지만 2·30년 전의 분위기에서는 그 가운데 하나만을 업적으로 제출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이 분위기였다. 그러나 교수를 평가하는데 오직 양적인 것만을 따지는 세태로 변했으니 세배로 부풀려 제출한 사람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학문적인 본령에서 본다면 이러한 계량적인 평가란 연구자를 잣대로 재려는 반(反)학문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진정한 연구는 인쇄된 종이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질(質)에 있는데, 어쩔 수 없이 학문의 몰이해 속에서 나온 정책에 정면으로 거부하기는 힘들더라도, 그 경향에 편승하여 이웃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든가 자기의 업적을 부풀리는 것은 학문이라는 이름을 쓴 세속적인 행동처럼 생각 된다.
사람이란 할 수 없이 시대적 산물이어서 연구업적을 적어 내라고 하면 적어내야겠지만 자진하여 학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책당국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업적 부풀리기를 하는 것은 학문을 금전에 예속시키는 것 같이 보인다.
학문이 정치나 돈의 하부구조에 머물러 있는 한 한 시대를 지도하여 문화의 방향을 만들겠다는 학문의 본령을 달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이나 돈 가진 사람이 던져주는 푼돈을 바라보고 상식을 초월한 행동을 하기 보다는 일생을 바칠 주제(主題) 하나를 잡고 과감하게 속물적(俗物的) 계량주의에 반항했던 30년 전의 분위기는 지켜 줄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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